[예화이야기] 70년 전 여관비를 갚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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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은 2003년까지 신호등이 없을 만큼 외진 곳이다. 영양에서도 북쪽 일월면 주실마을에 70가구가 사는데 교수가 14명. 교장이 19명이 배출되었다.
이 마을 출신인 한국진흥원장, 한(韓)일(日) 역사공동위 한국위원장을 지낸 원로학자 조동걸 교수가 70년 만에 여관비를 돌려준 사연이 있다. 그가 시골에서 서울에 유학하여 양정중학교와 덕수상고 야간부를 다니면서 신문배달과 사환을 지내며 고학을 하였다. 양정중 1학년 때 광복을 맞아 1945년 9월 고향에 가는데 안동에서 트럭을 타고 청송 진보에서 날이 저물어 여관에 묵게 되었다. 여관 여 주인이 차려준 저녁을 잘 먹었으나 여관비가 없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잠을 설치고 이튿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여관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갔다.

그는 그 일에 가책을 느끼며 70년을 지내다가 여관비를 돌려드리려고 그가 묵었던 여관을 찾아 갔다. 그러나 여관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제과점이 들어섰으며,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70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는 생각끝에 청송군 진보면 면사무소에 5만 원짜리 10장과 함께 편지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자필로 쓴 편지에는 70년 전 여관비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가게 된 사연과 이 돈을 진보면 여관 업무에 사용하여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보면 면장은 그 교수가 보낸 50만원을 진보면 내에 있는 여관 6곳에 그분의 사연을 담은 양심 거울과 비누 등을 기증하면서 전달하는데 사용하였다. 사람은 실수하고 뉘우치지만 그냥 품고 지나기가 일쑤다. 그러나 노교수는 죽기 전에 돌려 드린다는 뜻으로 그렇게 실천을 하였다. 10여 년 전 암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한방의료기관에서 요양 중이면서도 양심에 걸려 70년 전의 여관비를 갚은 사실은, 노학자 조동걸 교수의 참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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