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오늘날 터키 중부지역에 영국 영사로 부임했던 존 테일러(John Taylor)라는 인물이 있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중동 지역 전체를 지배하던 시대였고, 영국 영사라는 직책은 영국 정부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한직이었다. 존 테일러 영사의 취미와 ‘본업’은 그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고대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며, 인부들을 동원해서 발굴하는 일이었다. 그때는 ‘보물찾기식 고고학’ 시절이었고, 테일러는 ‘낭만적 고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61년 그는 그의 임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대 유적지 쿠르크(Kurkh)에서 운이 좋게도 큰 석비 하나를 발굴해냈다. 높이가 2.2m, 전면의 너비가 87cm, 두께가 23cm가 되는 석비였다. (학계에서는 이를 ‘쿠르크 석비’라고 부른다.) 왕이 서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쐐기문자로 촘촘히 새겨진 기록이 전면을 덮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귀중한 역사적 자료임을 알 수 있었다. 테일러는 즉시 이것을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오늘날은 발굴한 고대 유물을 발굴자의 나라로 반출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19세기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영박물관의 학자들은 석비의 기록을 해독하고 깜짝 놀랐다. 석비에 부조된 왕은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III)이고, 내용은 고대 역사에서 유명한 ‘칼칼(Qarqar) 대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학계는 놀랄 만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석비에는 구약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어 유럽의 구약학계를 흥분시켰다.
쿠르크 석비의 주인공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 3세는 구약과도 관련이 있는 왕이므로 그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전 859년부터 825년까지 34년 동안 앗수르 제국에 군임했던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 제국 역사에서 업적이 많은 왕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직업 군인 제도를 확립해서 전투력이 강한 상설 군대를 만들었다. 특히 마병대와 병거부대를 강화시켜 무적의 앗수르 군대가 되게 했다. 또한 귀족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 환관들을 중용했다. 군 고위직이나 제국의 지방 장관들은 가족이 없는 환관들에게 맡겨 왕에게만 충성하게 했다.
대외적으로는 앗수르 제국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숙적인 ‘우랄투’(Urartu) 왕국(오늘날 터키 동남부 산악 지역의 왕국)을 굴복시켜 제국의 불안 요소를 제거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바벨론에 총독이나 봉신왕을 세우는 대신, 자기 자신이 바벨론의 왕을 겸했다. 모든 것을 평정한 살만에셀 왕에게 남은 과제는 유프라데 강을 넘어 서부 지역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전 853년 대군을 이끌고 서부 지역 원정에 나섰다.
이를 알게된 아람(시리아)의 왕은 황급히 주변의 나라들을 규합해서 연합군을 형성했다. 모두 열 두 나라의 왕들이 선두에서 자기 나라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진격해 오는 앗수르 군대와 12개국 연합군은 아람의 북부 지역에 있는 ‘칼칼’에서 만났고, 대전투가 벌어졌다. ‘쿠르크 석비’에는 이 전투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기록되어있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