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창] 조만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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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도 기독교 가문 출신이었다.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나타나자 친척들은 그를 초청해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잔치가 끝난 다음에 김일성은 동료들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스탈린 원수가 쏴 죽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지만 마음속에는 무신록적인 세계관이 가득했다. 조만식은 해방 후 북한 사회에 중심이었고 특히 자유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그러했다. 해방 후 3.1절은 북한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싸우는 날이었다.

조만식이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운동에 깊이 연관된 것은 그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잘 알다시피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정신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조만식은 이 학교의 교사로 그리고 교장으로 일했다. 그가 이곳에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이승훈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일으킨 위대한 민족 운동가이다. 이승훈은 3.1운동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장이었던 조만식과 깊이 상의했을 것이다. 조 장로는 3.1운동 당시 독립을 위해 큰 노력을 했으나 33인에 이름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1919년 조만식은 오산학교의 다른 교사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려고 한 것이 들통이 나 학교에서 사임했고 그 이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려다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출소 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가 평양에 다시 돌아와서 맡은 직책이 바로 YMCA 총무였다. YMCA는 원래 서울 중심의 기독교단체였으나 조 장로는 이 단체를 평양에도 세워 평양 시민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평양 YMCA는 평양시민운동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조만식이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조만식은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민족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만식의 노력 덕분에 평양은 조선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일제는 조 장로의 교장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 장로는 평양에서 산정현교회 장로들과 함께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조선의 경제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조선에는 산업화가 막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고 있었다. 조 장로, 장로교회와 YMCA가 이 농촌 운동의 중심이었다. 조 장로는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기독교농촌연구회를 만들어 농촌 문제에 실질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결국 조 장로는 독립운동은 실력을 양성해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일제 지배하에서는 실력을 양성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사실 이같은 인재가 없었다면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3.1독립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조 장로의 실력양성운동을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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