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7)
구미에서 상주까지 (5)
낙동강변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흑두루미쌀은 명품쌀로 이름이 높다. 이 흑두미쌀은 해평철새도래지를 찾아오는 진객(珍客)인 흑두루미에서 유래한다. 해평면에서 중요한 볼거리는 해평철새 도래지이다. 이 지역은 국가 지정의 세계적인 습지로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낙동강 유역의 갈대밭 주변에 존재하는 습지이다. 이 습지에 다양한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 지역을 지나다 보면 조류 연구가들과 사진작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곳 철새 도래지에 찾아오는 철새는 세계적으로도 보기가 힘들어 민통선 부근에서만 볼 수 있는 철새인 두루미 종류를 유일하게 해평 철새 도래지에서 볼 수 있다. 이곳에 재두루미, 흑두루미와 고니, 기러기, 오리류 등이 찾아온다. 그리고 독수리, 원앙, 왜가리, 백로, 황조롱이 등의 텃새도 관찰된다. 이 지역은 습지가 발달되었을 뿐 아니라, 맑은 낙동강에 퇴적된 깨끗한 모래톱과 갈대숲 그리고 낙동강 양안에 인근에 넓은 농경지가 상존하여 철새들이 이곳에서 먹이를 구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겨울철에 월동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순례를 하는 도중에 사진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사진작가들이 철새를 찍는 모습을 한동안 서서 지켜보기도 했다. 사진작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작품 한 점을 얻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한 자리에서 기다린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 중에 기다리는 시간이 참 많은 것 같다. 기다림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지만 기다림이 있기에 인간의 삶은 가치있는 시간이 된다. 어느 인간도 기다림이 없이 자신의 시간을 마구잡이로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기다렸는가가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기다림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기다림은 가장 가치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다리는 동안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모습에 대비된 타인을 보기도 하고 타인의 모습과 대조되는 자신을 보기도 한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자신도 타인도 잊고 살지만,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타인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삶의 오묘함인 것 같다.
기다림의 시간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역설의 시간이다. 그럼 점에서 보면 기다림은 표면적으로 볼 때 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림이 있는 인생은 빼기가 아닌 더하기이다. 그것은 자신의 볼 수 있는 안목도 타인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인식의 기회는 거의 유일하게 인간 삶의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 찾아온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선물처럼 다가온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엄숙한 과제이다.
외로운 산길 들길 걸어 물어물어 찾아온 해평 객사(客舍) 곁의 자리 잡은 주막에서 배위량은 훈훈한 봄향기 속에 스며드는 피곤함을 이기며 아래와 같이 일기를 쓴다.
[…] 밥값은 한 상(床, table)에 35전에서 60전으로 올랐다. 날은 화창했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기후는 차가웠다. 부산의 기후보다 20여일 늦는 것 같다. 고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느끼는 신선함이 있다. [주막]의 마당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마구간이다.
배위량의 일기를 읽으면서 위대한 꿈을 안고 이역만리 선교지에 나왔지만, 현실적인 안목으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한 위대한 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한 끗 차이’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고민 없이 위대함이 이루어지는 예는 없다. 그것이 현실 세계이다.
해평(海平)은 과거에 선산에 속하기도 했지만, 한때는 안동에 예속되기도 했고 또한 상주에 예속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해평은 선산의 한 지역이 되었다가 지금은 구미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해평(海平)이란 이름은 마치 바다처럼 넓은 평야란 의미를 지닌다. 그 이름처럼 해평은 인심이 넉넉한 지역이다. 해평에 객사(客舍)가 있어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타국(他國)의 사신들이 한양을 오갈 때 객사를 숙소로 사용했다. 관리들이나 사신이 말을 갈아타고 갈 수 있는 지역에 객사나 객주가 있었다. 그리고 객사가 있는 곳에는 일반 여행자들이 묶는 주막집도 존재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배위량은 동명에서 상주로 가는 동안 장천이나, 인동에서 잠을 자지 않고 더 먼 거리에 있는 해평까지 와서 잠을 잔 것 같다. 배위량이 장천이나, 인동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해평까지 왔을까? 그는 사신도 관리도 아니었기에 일반 여행자들이 잠을 잔 곳인 여타지역의 주막에서 잠을 잘 수도 있었겠지만, 해평까지 왔다. 그는 해평의 어느 주막에서 잠을 잤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에 객사가 있는 곳은 교통의 요지로 지역의 중심을 이루었기에 숙박업소가 존재했을 것이고 여행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도 구입할 수 있는 지역 거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배위량은 객사가 있는 멀리 해평까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해평(海平) 장은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오일장으로 4일과 9일에 선다. 해평오일장은 여느 시장처럼 옛 이야기를 고이 품고 있는 오일장으로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138-17번지(강동로 1629)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해평에서 낙단보까지 가기 위해서 구미보를 거쳐 지나간다. 구미보는 경북 구미시 선산읍 원리와 해평면 낙산리를 연결하는 낙동강에 건설된 보이다. 구미보에 세워진 중앙전망대는 구미(龜尾)를 상징하는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구미보에서 생산하는 수력발전시설은 아파트 3천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3천KW규모이다. 필자가 구미보를 처음 찾았을 때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가기 위해 낙동강에 새롭게 조성된 자전거길을 따라 가는 길에 구미보에 들른 젊은이들 한 무리를 만났다. 그들의 패기와 용기가 좋아 보였다. 옛날에는 화랑도들이 전국의 유명한 산천을 주유(周遊)했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이 자전거로 주유한다. 저 젊은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먼 길을 달려 왔을까? 세상에는 힘든 일도 많지만, 의미있고 보람된 일도 많다. 그런 것을 저 젊은이들이 알게 된다면 저렇게 힘든 길을 나선 것이 중요한 경험이 되리라고 본다. 세상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뜬다면 그 변화하는 개체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객관화하여 자신의 세계로 이입(移入)하는 일도 자신의 삶의 과제(課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어떤 형태로든 여행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 같다. 집 떠나면 고생이지만, 집을 떠나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아침 해를 바라보거나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감정이입(感情移入)의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길 떠나온 나그네의 것이기에 그렇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 – 19)로 고된 시간을 살아가는 올 봄에는 그런 마음으로 배위량 길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