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79)

Google+ LinkedIn Katalk +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8)

구미에서 상주까지 (6)
배위량은 분명히 그 당시 사람들이 다니던 길로 선산군(구미시) 해평면에서 상주시 낙동면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해평에서 낙동으로 갈 때 당시의 길을 찾을 길이 막막하여 낙동강 제방 길을 따라 낙동으로 갔다. 구미 해평에서 상주 낙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미 도개면을 거쳐 의성군 단밀면을 거쳐 가야 한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다녔던 길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다. 아무도 구미에서 상주까지는 당시의 영남대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당시 영남대로 길을 따라 한양에서 과거를 보는 사람들은 문경 새재를 통해 오르내렸다.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3개가 있었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루면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의 경계를 이루는 추풍령(秋風嶺)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221m이다. 이곳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나누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경북 영주 풍기와 충북 단양으로 이어지는 한강과 낙동강 수계의 분수령인 죽령(竹嶺)이 있고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문경새재, 즉 조령(鳥嶺)이 있다. 문경새재는 영남지역과 한양을 이어주는 제 1대로인 영남대로에 위치한다. 이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역이 ‘문경(聞慶)’이란 말이 지닌 의미인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이란 의미 때문에 영남의 선비들은 추풍령과 죽령을 피해 조금 돌아 가더라도 즐겨 문경새재를 오르내렸다. 심지어 호남의 선비들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때는 돌고 돌아 멀리 문경으로 와서 문경새재를 지나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영남대로를 오르내리는 사람은 영남대로를 이용한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 지역민들이나 생업에 필요하여 그 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 보부상들도 포함된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생필품을 사고팔아야 하고 여행을 해야 했고 생업을 위해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럴 때 영남대로는 중추적인 길로 이용되었다. 이 시장 저 시장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파는 장돌뱅이를 보부상. 행상 또는 방물장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보부상(褓負商)은 팔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다니거나 등에 지고 다니며 팔았던 사람들인데,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조선 시대에 와서 전문 상인 통상의 중요한 전달자가 되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물건을 매매했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다. 이들은 여러 포구와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팔았던 소규모 상인들이다. ‘보부상(褓負商)’은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으로 구분되는데, 부상(負商)은 주로 지게를 이용해서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니며 식생활과 관련 생활용품인 생선, 소금, 토기 등이나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팔았다. ‘보상(褓商)’은 작은 생활용품 즉 댕기, 비녀, 얼레빗 같은 생활용품과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다니며 팔았다.
영남지역의 보부상들은 영남대로를 주간선 도로로 삼아 각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물건을 나르고 사고파는 역할을 했다. 객주는 보부상들이 다른 지역의 물건을 가져 오면 그것을 사고 다른 보부상이 가져온 물건을 또 다른 보부상에게 팔고 보부상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물건을 중개하고 은행 업무까지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보부상은 대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던 농민 출신들이 많았다. 나중에는 양반이나 수공업자들이 보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 어쩔 수 없이 보부상의 길을 택했다는 점은 같다.” 영세 상인이었던 보부상들은 상품을 등에 메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크게 배우지 못했으며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약한 존재였던 보부상들은 어느 집단보다도 결속력이 강하였다. 이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함께 하면서 조직원들의 결속력을 다졌다. 지금의 큰 대로는 산을 뚫고 다리를 놓아 직선으로 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토목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가능하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산을 넘는 길을 택하고 강둑길을 따라 걷고 구릉을 넘는 길을 택했다.
소설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보면 봉평장과 대화장을 주 무대로 하여 근방 여러 지역의 장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장돌뱅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이지만, 시적인 운율이 소설 전반에 흐르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표현들이 뛰어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된다.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단순히 장꾼들의 떠돌이 생활을 중심으로 허 생원과 동이 사이에 비밀을 암시적으로 숨겨둔다. 이효석은 보부상들의 애환과 삶을 중심으로 묘사하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사는 존재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무감을 애잔한 스토리 속에 숨겨두고 잡초같은 인생살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야 할 인생의 의미와 희망을 암시적으로 묘사한다. 이효석은 이 소설 곳곳에 흐르는 뛰어난 명문장으로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주: 이제 막]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주: 흐뭇하게]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날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밤에 숨이 막혀 하였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발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 나오는 위의 구절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문장이다. 이 문장에서 인간 심성 깊숙이 내재된 향수를 이끌어 내는 이효석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산문체의 글이지만 시적인 언어감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정적인 문체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가진 가치가 드러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인공인 허 생원, 조 선달과 동이는 나귀를 끌고 다니는 장돌뱅이들이다. 허 생원,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노새 한 마리씩 몰고 다니며 장돌뱅이로 봉평장과 대화장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해서 먹고 산다. 소설 전반에 걸쳐 아름답게 나타나는 줄거리 속에 세 명의 모습이 성공한 기업가의 모습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 나타나는 주인공 세 사람을 기구하다거나 불행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효석은 꾸밈이 없이 수수한 언어 전개를 통하여 질박(質樸)하게 살아가는 옛 세대의 잡초같은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켜 유토피아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점에서 이효석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추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 소설가 이효석이 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서 봉평에서 대화까지 팔십 리 길을 묘사한 이 대목은 한국 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문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36년 10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은 평창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의 순박한 본성과 인연의 기구함을 그려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