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것은 1892년 초였다. 7명의 선발대가 한국으로 출발했는데 데이비스(Linnie Davis) 양이 1892년 10월 18일 최초로 인천(제물포)항에 도착했고 나머지 최의덕(Lewis Boyd Tate) 남매, 전위렴(William McCleary Junkin) 부부,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 부부였다. 이들은 1893년 1월에 북장로교와 장로교 공의회를 만들어 남장로교는 전라와 충청지방 선교를 맡기로 합의하였다. 처음 군산, 전주, 목포의 세 선교부(Station)를 개설했는데 전주를 책임지는 선교사는 최의덕, 최마태 남매선교사였다.
전주 기전학교는 최마태(Mattie Samuel Tate) 선교사가 1902년부터 개인 집에서 여학생들을 2년 동안 가르쳤다고 「기전 80년사」에는 쓰고 있다. 최마태 양이 가마를 타고 전주에 왔을 때나 집에 정착했을 때도 ‘고운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호기심의 대상이어서 매일 4, 5백 명씩(?) 창호지 문의 구멍을 뚫고 쳐다보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니 어린 여아들을 불러 글을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2년 후 1904년에는 군산에서 사역하던 전위렴 선교사 내외가 전주로 왔다. 전위렴은 군산 선교부에서 유대모(Alexander D. Drew) 의사 부부와 함께 사역하던 분이다. 그는 원래 몸이 허약했는데 선교지역을 군산 인근 지방에만 국한하지 않고 옥구, 익산, 김제 등 지역을 정기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자신의 건강 상태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모 의사와 함께 너무 심하게 선교·의료 활동을 하여 유 의사는 미국으로 귀환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선교부는 전위렴 선교사를 전주 서문밖교회로 전임시켜 전주 근교 20리 밖의 전도 활동은 제한시켰다. 그때 최마태 선교사를 이어 학교를 맡았던 분이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 전킨(Mary Leyburn Junkin)이었다. 전킨(한국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불렀음)은 매우 불행한 여인이었다. 내한해서 어린애 셋(Sidney, Francis, George)을 의사 없이 낳았는데 모두 풍토병이나 폐렴으로 죽어 선창 가를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 위에 묻었다. 아마 유대모 의사가 귀국한 뒤의 일인 것 같다. 그녀는 또 이 뿌리에 염증이 생겼고 후에는 계속 편두선 염으로 고생했다. 그뿐 아니라 전주로 와서는 4년 뒤 병약한 그의 남편을 1908년 1월 2일 본향으로 떠나보냈다.
장례식 때 전위렴 목사를 추모하던 많은 교인이 몰려들었다. 한국에서의 미국인 장례식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전위렴의 장례 전, 한국 사람을 시체가 있는 방으로 들여보내 옷을 입은 전 목사의 모습을 보게 할 것이냐로 이론이 많았으나 전킨 여사는 “남편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데 피곤해 하거나 피하지 않았다”라면서 입장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전위렴 목사는 1904년부터 이눌서 목사의 뒤를 이어 전주 서문밖교회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아내 전킨을 많이 도왔으므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미국 선교부는 그의 아내가 경영한 학교를 기념하여 교명을 ‘전킨 기념학교(Junkin Memorial School)’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기념(紀念), 전위렴(全緯廉)>으로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가 되었다.
기전여중·고는 내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학교이다. 1960년 일생 처음 정규 수학교사로 취임한 학교이기도 하지만 불신자이던 내가 신자로 거듭난 학교다. 이 학교는 내 어머니 같은 학교다. 내가 대전대학으로 학업을 계속하러 퇴직했을 때 2년 동안을 기다려 주었다가 다시 불러 주었다. 복직 후 1년 반 만에 또 하와이로 미 국무성 장학금으로 수학·과학 교사 연수를 떠날 때 일 년 반 동안 월급의 반을 도와주며 보내준 학교다. 주께서 내가 세상으로 뛰어나가려는 것을 늘 불러 붙들어 놓으시고 기독교인으로 살도록 집중적으로 훈련하신 곳이기도 하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