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시대 이스라엘 역사에는 41명의 왕이 등장했다. 남유다 왕국에 21명, 북이스라엘에 19명, 그리고 첫 번째 왕 사울을 포함하면 모두 41명이 된다. 하지만 어떤 왕도 자기의 석상이나 부조한 조각으로 자기의 형상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도 그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단 한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1846년 영국인 라야드(A. H. Layard)는 한때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님루드(Nimrud)를 발굴했다. 그곳의 고대 이름은 ‘칼후(Kalhu)’였고, 창세기에는 ‘칼라(Calah)’라고 나온다. (창 10;11,12) 원래 앗수르 제국의 본거지는 ‘앗수르’였다. (이 도시 이름에서 앗수르 제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때 님루드로 천도하여 그곳이 160여 년간 제국의 수도가 된 때가 있었다. 따라서 님루드는 거대한 왕궁과 신전들을 갖춘 왕도였다.
라야드가 님루드 발굴을 시작했을 때, 바로 다음날부터 과거 왕궁의 벽면을 장식했던 석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땅속에 파묻혀 있던 왕궁터를 정확히 알아맞힌 것이다. 발굴된 석판에는 부조로 조각된 앗수르 왕과 함께 쐐기문자로 왕들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중한 역사적 자료들이다. 라야드는 3개월여 동안의 발굴에서 엄청난 분량의 유물을 발굴해냈고, 이들을 모두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다. 오늘날 대영박물관이 앗수르 제국의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게 된 연유이다.
라야드는 발굴 작업을 끝내려는 마지막 날,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 유물을 발굴해냈다. 고고학계에서 ‘흑석 오벨리스크(Black Obelisk)’로 불리는 유물이다. 흑색 돌로 만든 4면체 모양으로 높이가 2m에 이르는 길쭉하게 키가 큰 기념물이다. 윗부분으로 올라갈수록 4면이 조금씩 좁아져 흡사 애굽의 오벨리스크 모양과 같다고 해서 ‘흑석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4면의 각 면에는 부조로 조각된 패널이 다섯 개씩 있어, 4면 모두 합치면 20개의 부조된 패널이 있다. 부조된 내용은 앗수르 제국 내에 있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제국의 왕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품을 가져와 바치는 장면들이다.
그중에 한 패널에는 살만에셀 왕 발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복하고 있는 수염 난 인물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패널 밑에 쐐기문자로 쓰여진 기록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므리의 아들, 예후 (영역 Jehu, Son of Omri).” 앗수르 왕 발 앞에 부복하고 조공을 바치는 인물이 북이스라엘의 왕 ‘예후’라는 것이다. “예후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예후가 앗수르 왕을 찾아가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구약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고고학 자료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서 예후 왕은 이스라엘 왕들 중에 외모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왕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후는 정변을 일으켜 오므리 왕가에 속한 ‘여호람’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즉 예후는 오므리 왕가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그런데 ‘흑석 오벨리스크’에는 예후가 오므리 왕가에 속한 왕이라는 의미로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구약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있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