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9)
구미에서 상주까지 (7)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인공 3인이 모두 인생의 밑바닥에서 인고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각자 삶의 여유를 누리며 소박한 희망을 안고 일하고 있다. 이효석은 그 주인공들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각자 가진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 소설 저변에 두고 있다. 이효석은 허생원, 조선달 그리고 동이 3인과 그들이 활동하는 무대를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 주인공 중의 한 명이 허생원이다. ‘생원(生員)’은 조선시대의 생원과의 과거에 급제(及第)한 지식인이었다. 생원에 대하여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시대에 소과의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 이들에게는 진사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보통은 성균관에서 일정 기간 수학한 뒤 대과인 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음서(蔭敍)나 취재(取才)를 통해 참봉·훈도 등으로 출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3년마다 실시되는 생원식년시의 선발인원은 100인이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식년시 162회, 증광시 67회로 총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배출된 생원의 총수는 2만 4천여 명 정도 된다. 이들 중 문과에 진출한 수는 3천 명을 밑돌므로, 절대 다수의 생원이 관직으로 나가지 못하고 향촌사회에서 지식인으로 행세한 셈이 된다. 이들은 벼슬은 없었지만 군역이나 잡역을 면제받는 특권층이었고, 서원에 원생으로 들어가 공부하고자 할 때도 우선권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생원은 학교를 거쳐 과거에 응시하는 거자이므로 우리나라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생원’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허생원이 진짜 생원 급제한 인물이라서 ‘생원’으로 부른 것인지, 아니면 중인이나, 상인 계층의 사람인데, 문자를 쓰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생원으로 불러 준 것인지, 아니면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에 쓴 소설의 무대가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생활양상이 무너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지, 그래서 의미 없는 계급 사회에 안주하기보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하여 생원 급제한 허생원이 쇠락한 가세를 회복할 양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것인지 어떤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잔반(殘班)’은 “조선시대 정치에서 몰락하여 농민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양반 계층을 이르는 용어”이다. 잔반들은 자신이 양반계층 출신이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인(中人)이나 상인(常人) 계층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쇠락한 양반계층의 사람들을 일컫는 ‘잔반(殘班)’에 대하여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나타나면서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 양반 계층을 말한다. 이들의 혈통은 양반이나 실제로는 각 지방에 흩어져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계층으로 실제 생활은 농민이나 상민과 다름이 없었다. 조선 후기 농민층이 분화되고 경제적 변화가 나타나면서 몰락 양반들도 나무를 해다 팔기도 하고,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허생원이 진짜 생원이었다면 허생원은 이름뿐인 양반의 체면을 지키고 생원으로 그냥 폼만 잡고 앉아있기 보다 비록 잔반의 처지가 되었지만,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허생원이 양반의 체면이나 그 때까지 쌓았던 지식에 안주하지 않고 실제의 생활 전선에 나섰다면 그가 이미 생원급제한 신분의 사람이 보부상으로 나서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효석은 허생원을 왜 허생원으로 지칭하는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독자에게 맡긴다. 단지 소설의 주인공이 오랜 시간 동안 외지를 돌며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문(利文)을 남기는 장돌뱅이 생활을 하는 허생원이란 것을 말하고 동이와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이 소설에 묘사되는 허생원은 성공한 기업가나 성공한 상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장돌뱅이의 모습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허생원, 조선달 그리고 동이와 같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김첨지’란 말도 등장한다. 첨지(僉知)는 “중추원에 속한 정삼품 무관의 벼슬”이지만, “나이 많은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말에서 유추해 볼때 허생원도 당시 사람들이 문자깨나 쓰는 그를 생원으로 칭하여 허생원으로 편하게 불러주어 그를 허생원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생원은 오일장을 떠돌면서 동업자인 조선달처럼 여러 가지 피륙을 팔던 가게인 드팀전(廛)을 열었던 보부상이었다. 아마 허생원은 드팀전에서 평생 잔뼈가 굵었던 사람이었고 그 일에 전문가로 조선달과 같이 함께 움직인 보부상이었다. 허생원의 인간성은 화합하는 유형이다. 그는 동이를 야단치면서도 그를 염려한다. 그것을 보면 허생원은 비록 못생긴 얼굴상을 가졌지만, 인간적으로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이효석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을 좋아하고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봉평과 진부 사이의 길을 걷고 싶어 하고 그곳에 있는 메밀밭을 찾아가서 보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에 담고 있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 인물에 나타나는 인간상은 너무 멀리 있는 고고한 인품의 위인이 아니라 성실한 인간성을 잃지 않고 억척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보통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정겹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큰 부자도 아니고 자수성가한 큰 위인도 아니고 그저 가까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효석은 아주 멋들어진 묘사로 소설의 주인공들이 독자들과 같이 호흡하도록 동질감을 불어넣어 준다. 이런 묘사가 ‘메밀꽃 필 무렵’이 독자에게 끌리는 멋이다.
배위량을 생각하면서 해평에서 낙동까지 걷는 끝없는 평야길을 걸었다. 넓은 낙동강변의 고수부지에 끝없이 펼쳐진 개망초의 흰꽃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불현듯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밤에 숨이 막혀 하였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발걸음도 시원하다”란 표현이 생각났다. 희디흰 개망초를 보면서 흰 메일꽃에 대한 묘사가 생각났다.
이효석은 봉평에서 대화까지 가는 길에 펼쳐진 메일꽃을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이효석의 메밀꽃을 보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꺼이 봉평으로 간다. 그곳에서 해마다 메일꽃 필 무렵에는 메밀꽃 축제도 열린다. 그런데 배위량은 한국인에게 끼친 영향이 아주 큰 인물이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배위량과 그의 삶에 대해서 알고, 그가 한국 민족을 위해서 끓임 없이 일하고 연구한 것을 안다면 그를 기억하고 그가 한국 민족과 함께 호흡하며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일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고 그의 삶과 신학과 사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를 기억해야 마땅할텐데 그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그를 새롭게 찾기 위하여 그가 순회 전도 여행한 길을 찾아 순례를 하고 그가 일한 곳을 방문하고, 함께하면서 그를 기억하는 모임을 가지고, 기억에 남는 글을 쓰는 연구가, 아름답고 수려한 문장으로 글을 쓰는 작가, 그리고 그가 순회 전도 여행을 했던 길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와 음악가가 나타나길 기대한다. 어떤 일이라도 다방면의 다양한 일꾼이 함께 할 때 그 일에 가속력이 붙고 의미가 따르고 성과도 클 것이다. 그래서 함께 걷고, 연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하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속히 오길 기대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