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81)

Google+ LinkedIn Katalk +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60)

구미에서 상주까지 (8)
보부상에 대한 글을 쓰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의 문을 닫는 저녁까지 역사 자료를 찾기도 하고 이것저것 찾는 중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단편 소설집이 생각나 그것을 빌려 어둠이 내리는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다. 좀 쌀랑한 날씨였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가로등 불빛 아래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읽은 것인데, 새롭다. 그때 그저 숙제로 수업에 필요하여 읽었기 때문인지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새롭게 읽는 내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여있는 내용이 새롭게 와닿았다. 명문장으로 구성된 글 전체에 애잔한 정서가 흐른다.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시절의 애닮고 처연하고 서러운 모습이 그려지며 잡초같이 살아온 조상 세대의 사람들의 고달픈 모습에 눈길이 가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설 속에 장돌뱅이 3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들 주위의 일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룬다.
‘메밀꽃 필 무렵’을 읽게 된 이유는 매주 배위량에 대한 글을 써서 한국장로신문에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마침 그때 영남대로를 많이 걸었음직한 사람들이 보부상 즉, 장돌뱅이들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였다. 장돌뱅이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다가 장돌뱅이에 대한 글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온다는 것이 생각났다. ‘메밀꽃 필 무렵’에 보면 장돌뱅이, 즉 보부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줄거리가 아주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어릴적 필자가 나고 자란 마을을 지나다녔던 보부상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필자의 고향인 고령군 우곡면 황성마을은 3면, 북쪽, 동쪽과 남쪽이 회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뒤쪽, 즉 서쪽은 산으로 막혀 있다. 지형적으로 황성마을은 왼딴섬처럼 외진 곳이다. 옛날에는 황성마을 끝자락을 따라 황성마을의 북->동->남쪽으로 흐르는 회천강가 마을 북쪽 어귀에 주막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신작로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대구로도 가고 고령으로 나들이도 다니든지 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가용으로 전국으로 왕래한다. 하지만 버스가 다니기 전에는 모두가 걸어서 다녔다. 그런데 외진 황성마을이 어릴 적에는 우곡에서 고령으로 가는 길목이 되었다. 어릴적 사촌리 앞으로 신작로가 생기 전, 그리고 강건너 마을인 개진면 반운리와 신안리 앞에 제방이 세워지기 전에는 대부분의 우곡 사람들이 고령읍으로 볼일 보러 갈 때 우리 마을 앞으로 지나다녔다. 특히 황성마을 주막 앞의 회천강에 섭다리가 놓여진 늦은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섭다리를 건너 장보러 다니는 사람들과 겨울에 개진면 각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나무하러 오는 사람들, 봄부터 가을까지 황성마을 뒷산으로 소먹이러 오는 개진면 사람들로 황성마을은 늘 북적북적했다. 고령장날이 되면 우곡면 사람들이 우리 마을 앞으로 오일장에 내다팔 거리를 담은 지게를 지거나 보자기에 싸서 이고 가거나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지나다녔다. 강 건너 사촌리 사람들도 강을 건너와 우리 마을로 가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열뫼리 –> 신안리->반운리를 거쳐 고령으로 가든지 아니면 열뫼리->직리->양전리를 거쳐 금산재를 넘어서 고령으로 가야 했기에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강을 건너는 것이 귀찮고 어려운 일이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사촌리 사람들도 강을 건너 우리 마을로 들어와 주막에 놓인 다리를 건너 고령장으로 나들이를 다녔다. 그것은 강을 건너와 황성마을을 지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구 수가 여남은 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조용하고 작은 황성마을이 고령 장날만 되면 마을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시끌벅적 했다. 어릴 때 마을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한 사람,’ ‘두 사람’ 헤아리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령 장날뿐만 아니라, 황성마을을 거쳐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엿장수도 있고 보부상도 있었다. 우곡에서 고령으로 가려면 조용하고 작은 황성마을을 거쳐야 더 빠르게 갈 수 있었기에, 모두 황성마을을 지나다녔다. 가끔은 합천군 덕곡면에서 소학산을 넘어 대곡리로 들어와 야정리를 거쳐 고령읍으로 가는 길에 황성마을을 지나가기도 했다. 고령에서 우곡면이나 현풍읍이나 구지면과 창녕군 이방면, 합천군 덕곡면 등지의 남쪽으로 갈 때도 황성을 거쳐 지나갔다.

당시 황성마을 주막 어귀에는 섭다리가 놓여 있어 도진리와 아곡마을 사이에 있었던 도진 나루터처럼 황성마을은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래서 보부상들도 우곡에서 고령으로 가는 길목인 황성마을을 자주 지나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보부상 아주머니와 물건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보부상 아저씨들이 거쳐 가셨다. 서산의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회천강 건너 마을인 개진면 반운리 또는 신안리로 가기 어려우면 우리 집으로 찾아 오셨다. 고령에서 우곡면 쪽으로 가시는 분들은 멀리 야정까지 가기 힘들다 싶으면 황성마을로 들어오셔서 하루를 묵고 가시는데 그럴 경우는 대개 우리 집에 들어 오셔서 주무시든지 쉬어 가셨다. 그 이전에는 황성 주막의 규모가 어떤지 모르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 황성 마을의 주막은 안방과 건넛방 그리고 부엌이 있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다. 그래서 식구 많은 주막집 식구들이 살기에 딱 적당한 규모라 손님이 묵어갈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집 너른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떤 분들은 해가 중천에 있는 데도 피곤하다고 하루 쉬어 가겠다고 들어 오셔서 밭일도 집안일도 도와주시기도 하시고 잠도 주무시고 가시기도 하셨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때는 땟거리 하나 마련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땟거리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먼 일가친척들이 겨울철에는 우리 집으로 와서 겨우내 우리 식구들과 같이 지내다가 이듬해 2월이 되어 아이들 겨울방학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겨울은 두 가족이 우리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4대 독자이신 아버지는 외롭게 사셨던 옛일을 기억하시고 멀리서 오시는 일가친척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친가쪽 사람이든 외가쪽 사람이든 다 받아들이셔서 겨울철만 되면 늘 사람들로 집안이 북적거렸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일이 많아 힘이 드셨을 텐데도 먼 친척뿐만 아니라, 오다가다 들르는 보부상까지 받아들이시고 먹이시고 재워 주셨다. 없이 살며 지내던 시절 식구들 먹일 일이 까마득하여 온가족이 이리저리 이사 다녔던 고단한 삶을 기억하셨는지 도움을 구하는 분들에게 거절치 않으시고 재워 주시고 먹여 주셨다.

충남 금산에서 오신 한 보부상 아주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씩 보자기 가득 화장품이며 장신구며 옷가지와 인삼제품 등등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생필품을 파셨다. 그분의 삶이 참 고달팠을 텐데도 늘 밝고 상냥하셨고 어머니와는 친구처럼 지내셨다. 남쪽으로 내려오시면 늘 우리 집에 오셨다. 그분은 가족처럼 우리들에게도 잘 해 주셨다. 그 아주머니는 여행에 힘드시면 며칠씩 우리 집에서 쉬어 가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 그냥 쉬지 않으시고 집안일도 거들어 주시고 밭일도 거들어 주셨다. 물건을 팔아도 시골에는 돈이 귀하니 물건을 판 값으로 보리나 쌀을 받고 물건을 팔았는데 그것이 모이면 제법 무게가 나간다. 그러면 그것을 처분하고 돈으로 바꾸든지 다른 물건을 오일장에서 사서 다시 농촌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팔아야 했다. 보리와 쌀 등은 무게가 많이 나가 그것을 이고 멀리 못 가니 고령읍에 오일마다 서는 오일장에 가서 팔고 돈을 바꾸든지 다시 팔 물건을 구입해야 했다. 그래서 그 오일장의 때를 맞추기 위하여 우리 집에서 장날에 맞추어 가느라, 쉬어 가신 듯하다. 그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작은 병의 경옥고를 선물로 주시기도 하신 것이 생각난다.

어릴 적에 경험했던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고령장에 채소 팔러 다니시던 부모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고 그때 부모님 따라 고령장에 나들이 나갔던 일도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배추, 쪽파(당파), 파, 우엉, 참깨, 들깨와 땅콩 등을 아버지께서 지게에 담아 지고 고령 장으로 가져가시면 그것을 팔아 우리들 공부를 시키셨다. 그것들을 파는 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아버지께서 농사일 때문에 장에 못 가시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찬거리와 채소나 곡식 등을 머리에 이고 고령읍까지 걸어 가셔서 그것들을 파셨다. 그럴 때면 나도 어머니를 졸라 고령 오일장 구경한다고 가끔 따라갔다. 바로 밑의 동생과 오일장에 따라가는 일로 서로 우기다가 내가 갈 때도 있고 동생이 갈 때도 있었다. 활발한 동생은 어머니를 잘 도와주어 파, 당파, 무, 배추와 정구지 등을 팔 때 어머니 곁에서 파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나는 채소를 파는 어머니 곁에 붙어 있질 못하고 숫기가 없어 멀찍이 떨어져 있곤 했다. 나이 들어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모자라게 행동했을까 후회가 되고 불효했다는 생각이 되고 못났다고 생각이 든다. 너무 늦게 철이 들고 보니 부모님은 이미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프다.
언젠가 나도 부모님처럼 직접 농사를 지을 기회가 오면 읍내까지 지게에 바지게를 얹고 그 바지게에 무, 배추, 파와 당파를 담아 그 지게를 지고 고령 오일장에 가서 한번이라도 그것들을 팔아 한 푼이라도 벌어 봐야 겠다. 부모님의 그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해서! 그러면 그 시절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부모님께 조금 덜 죄송할 것 같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