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두 마디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문장이 인류를 구원했다. 하나님의 성품을 집약한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랑이다. 하나님 성품인 사랑 안에 용서의 하나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의 성품이 녹아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위의 예시와 결이 다른 성품이 있다. 곧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이다. 공의와 공평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 모두에 관심을 가지신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동일한 생기를 받은 존재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이유이며 천부적 인권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오늘 우리 사회 도처에도 정의와 공평에 대한 구호와 요구가 넘쳐난다. 개인의 행복이 사회의 정의와 공평에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와 공평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추구해야 할 필연적인 권리이며 과제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의와 공평을 말할 때 놓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공평의 권리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의 평등과 공평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공평은 언제나 공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의가 필수이다.
온전한 공평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악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시는 분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잘못들과 죄악들, 실수와 어리석음, 부족함과 부끄러움까지 평등하게 공의의 저울에 올려놓은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공평을 이루어 가시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공의의 저울에 달린 인간의 죄가 너무 무거워 공평을 이룰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기울어진 저울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얹어 공의와 공평이 평형을 이루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또 다른 공평이셨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공평이다. 그러므로 공평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누릴 수 있는 은혜인 것이다.
오늘 세상은 온통 달콤한 인권만을 누리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인간의 책임과 죄는 저만큼 밀쳐 두고 오로지 평등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치는 평등은 진정한 공평이라고 할 수 없다. 공의 없는 평등은 다른 이름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소외된 자가 모두 긍휼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이신 십자가가 있어야 긍휼을 입을 수 있다. 소수자가 다 배려의 대상도 아니다 그 가운데 십자가의 공의가 있을 때 자비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공의가 있을 때 진정한 평등과 공평이 이루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공평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평등이고 공평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속죄와 용서가 없는 일방적인 공평의 허상을 좇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공평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린 인간을 위해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장해 주신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공평이 예수님께서 감당해 주신 공의의 대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손신철 목사
<인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