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나가고 새 아침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는 밝은 태양을 바라보노라면 한없는 행복과 벅찬 기쁨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 아침에 뜨는 태양을 바라보면 그 감격과 기쁨은 배가 된다.
왜 그럴까? 새해의 첫 아침은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희망으로 가득찬 날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날만은 절망이 없다. 이날만은 좌절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이지만 새날이라고 부르고, 작년과 똑같은 날이지만 새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철학자들은 하루의 세 끼가 육신의 양식이라면, 인간이 품은 희망은 정신의 양식이라고 외쳤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희망은 인간의 생명이며, 삶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철학’을 논하며, 위르겐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새기려는 노력이다.
동물들은 희망하지 않는다. 동물의 본능에 희망이란 없다. 그날그날 하루의 먹이를 구하며 생존할 뿐 희망이라는 것이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람은 희망을 가지며, 희망을 노래한다. 그런 까닭에 희망이 없는 사람과 희망이 있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한낮 태양의 눈부신 빛과 한밤의 칠흑 같은 어두움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말은 살아 있어 남을 기쁘게 하고, 발걸음이 살아 있어 높은 산도 쉬 넘을 듯 씩씩하고 발랄하다.
희망의 태양이 밝게 비칠 때 하루하루가 즐겁고 삶에 생기가 넘친다. 반면 아무리 미래를 응시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삶에 생기가 사라진다. 이럴 때는 먼저 마음의 밭을 기경해야 한다. 기경한 마음의 밭에 희망의 씨를 뿌려야 한다.
그리고 그 나무를 가꾸고 자라게 해야 한다. 그리하면 희망의 열매가 반드시 열리고 때가 되어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희망의 씨앗은 주시지만 희망의 열매는 주시지 않는다. 희망의 열매는 내가 심고 가꾸고 거두어야 한다. 우리는 가슴에 희망의 등불을 켜야 한다. 희망하는 사람은 그래서 가슴이 뜨겁고 밝다. 희망은 생명의 원천이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건강한 꿈을 꾸고, 고난 속에서도 용감하고, 시련 속에서도 늠름하고, 역경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희망은 일상의 활력소이고 정신의 청량제이며 행동의 강장제이다.
새해 아침이 밝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획을 세운다. 일 년의 계획은 정월에 하고, 한 달의 계획은 초하루에 하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한다.
새날 새 아침은 새해의 삶을 계획하는 시간이다. 인간은 계획함으로 인생을 성취한다. 동물은 삶을 계획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미래가 있는 것은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과 희망, 그리고 복된 인생의 창조적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링컨 대통령은 새벽이 주는 은총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인이 된 다음 단 한번도 해가 뜬 다음에 기상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로 계획을 세워 대통령으로서 맡은 일들을 수행하였다.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대하고 바람직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계획은 원대하되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이런 계획이 없다면 희망도 꿈도 없는 허무한 인생이 될 뿐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