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즐거운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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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1883년에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 그의 유해를 미국으로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의 유해가 미국으로 오던 날 부두에는 뉴욕시가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군악대의 예표가 울리는 가운데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Chester Alan Arthur)와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해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의 주인공은 그가 남긴 노래 가사 하나 때문에 전 미국 시민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 1791-1852)이었다.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으로 알려진 그의 노래를 김재인이 <즐거운 나의 집>으로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애창되었다.

이 노래의 출처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헨리 비숍 경(Sir Henry Rowley Bishop, 1786-1855)이 작곡하고 페인이 대본을 써서 1823년 영국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된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or the Maid of Milan)에 나온다. 오페라는 지금 연주되지 않지만, 이 노래만은 살아남아 전 세계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악보로 출판되자마자 10만 부가 팔려나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가사를 쓴 페인은 행복한 가정을 가지지 못한 채 평생 혼자 살면서 방랑의 삶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인디언 탄압 정책을 비난하다가 실망을 느끼고 유럽과 아프리카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곡을 작사할 때는 프랑스 파리에 살았고, 나중에 튀니지 미국 영사로 부임하여 10년 동안 활동하다가 6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일본에서 <초라한 흙집>(埴生の宿)으로 번역되어 『중등창가집』(1889년)에 처음 수록되었고, 우리나라의 『신편교육창가집』에 같은 곡이 실렸다. 그후 1934년 이상준(李相俊)의 『풍금독습(風琴獨習)중등창가집』에는 <벗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1936년 홍난파가 만든 『특선가요곡집』에는 <나의 집>이라는 가사로 소개되었다.

가정이 없었던 그는 유언으로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나중에 미국 워싱턴 세인트 조지 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수많은 추모 인파가 그의 가족이었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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