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88)존 데이비슨 록펠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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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초 보스턴에 모인 교회 목사들 모임에 록펠러의 아내가 다니던 연합교회에서 해외선교회 사업을 위해서 10만 달러가 들어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헌금이 록펠러의 헌금으로 밝혀지자 화가 난 한 목사는 장로들에게 ‘더러운 돈’을 당장 돌려보내라고 했다.
록펠러는 세계 최고 부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의 순자산은 현존하는 미국 최고 부자, 빌 게이츠보다 3배나 많은 약 172조원이었다. 록펠러가 죽기 직전 그가 가진 재산은 미국 전체 부의 1.53%에 달했다. 그 엄청난 부를 98세까지 소유했었다.
록펠러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의 종교적인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였다.
그는 철저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였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게 살아온 록펠러의 생활방식은 곧 사업에서 많은 이윤을 남겼다. 교활한 업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클리블랜드에서도 가장 빈틈없는 석유 딜러로 유명했다. 그의 까다로운 성격은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거래를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물론 그의 비범한 성실함도 큰 몫이었다. 스탠더드오일의 신화는 대체로 그가 적시적소에 있었던 점, 즉 언제나 ‘잔을 제 위치에 두는’ 재주가 있었음에 기인한다. 돈을 벌면서 그는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과로와 피곤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 쉼 없는 일, 끊임없는 걱정, 거듭되는 과로, 불면증, 운동과 휴식의 부족이 그를 괴롭혔다. 스탠더드 사는 헨리 포드의 제1호 자동차와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한 비행기에 연료를 대주었다. 거기다 세계 최초의 가스 펌프를 개발해 선보였다.
그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았다. 록펠러는 그들이 회사 안의 일을 밖에 나가 ‘회사의 비밀을 누설’할까 봐 두려워했다. 한번은 독립적인 정유 업자와 10년짜리 사업을 체결할 때 그에게 내용에 대해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입을 열지 말고 사업을 하라.’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에서 최대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놀 시간도, 취미생활을 할 시간도 없었다. 돈을 버는 일과 주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말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 그는 일주일에 100만 달러씩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는 데 일주일에 2달러면 족했다. 의사가 그에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산성 물질이 첨가된 우유와 몇 조각의 크래커였다. 그의 피부는 탈색되어 뼈와 뼈 사이에 팽팽하게 늘여 걸쳐놓은 낡은 양피지처럼 보였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의학적 처치만이 53살의 그를 죽지 않고 살아있게 했다.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 그의 전기 작가인 존 K. 윙클러는 53살의 록펠러가 ‘미라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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