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목사는 우리나라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아직은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던 오래전인 1863년 2월 19일에 캐나다 온타리오주 엘마에서 5남1녀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학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 낭만적인 젊은이의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여름방학에 일어났으니, 그가 재학했던 토론토 대학에 온 세계적인 부흥사 무디 목사의 설교는 그를 변화시켜 일생을 선교에 헌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25세의 젊은 나이인 1888년에 토론토 대학 YMCA의 파송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고 그로부터 40년에 걸쳐 조선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언어와 문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게일은 조선어를 빨리 숙지하고 깨우쳤으며 우선 선교사업으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곧 이어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었으며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춘향전’과 ‘구운몽’ 등 우리의 고전을 영역하는 작업에도 매진하였다. 특별히 그의 경험을 살려 후에 오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한글과 조선어를 배우기 쉽게 하기 위한 교재 제작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모두 45권의 저서를 남겼고 이는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글쓰기에 정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가 된다.
게일은 특별히 교육사업에도 뜻을 두어 연동교회가 주축이 되어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를 창립하였으며 피어선 성경학교도 운영하였다. 또한 고종의 고문을 맡아 조선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하였고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신세대 청년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승만을 미국에 유학시키고 세례를 받게 함으로 후에 한국 기독교 전파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
게일은 찬송가 1장(만복의 근원 하나님)과 338장(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번역하였는데, 그 가사를 통하여 당시에 천주 혹은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던 ‘GOD’을 ‘하나님’으로 정착시킨 공로가 있다. 1900년 5월에 연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여 교회의 조직을 굳게 하고 다각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면서,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일면 한국 전역으로 그의 선교 범위를 확대하였다. 선교사로 부임한지 40년만에 연동교회에서 은퇴하고 1927년 6월에 영국으로 돌아가 부인의 고향인 영국 베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사망했다.
게일 목사는 대학생 시절에 우연히 접했던 여름방학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때의 결심을 일생 동안 지켜냈다. 어떤 힘이 겨우 25세 젊은이의 마음속에 역사하여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오지로 향하게 하였고 결국에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복음 전파의 뜻만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놀라우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끼게 한다.
그는 목사면서 교육자요 그리고 문학자였는데 특별히 이를 용이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언어 능력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이 재능을 오로지 우리나라를 위해서 평생토록 헌신할 수 있었음이 우리의 큰 복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언어 능력을 보면서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시어 제자들이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기적이 일어남과 같은 역사가 일어났음을 느끼게도 한다. 일찍이 그가 세우고 봉사했던 교회를 섬길 수 있음도 나의 축복이라 여기면서 94년 전 6월 이맘때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그를 추모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을 반추해본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