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위대함의 시작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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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그때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한 신대륙 발견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고 항해에서 돌아왔습니다. 축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기하는 사람들도 적잖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몰고 바다 서쪽으로 가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콜럼버스의 무사 귀환과 신대륙 발견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도 역시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달걀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달걀을 탁자에 세워 보십시오.” 사람들은 달걀을 세워 보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콜럼버스는 달걀 끝을 탁자 모서리에 부딪쳐 살짝 깨뜨리고는 모두가 보란듯이 반듯하게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오?” 콜럼버스가 말합니다. “그렇지요. 이미 한 일을 따라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처음 하는 것,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신들의 말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 말이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 해변(호수)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들, 요한과 야고보 형제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어부가 오직 그 네 사람밖에 없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어부의 전부였다면, 그날 갈릴리 호수의 물고기들은 잔치 잔치 큰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한동안은 갈릴리 호수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 잡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의 생활과 풍습을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당시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16개의 중요한 도시들이 있었고, 16개 도시에서 갈릴리 호수로 나가는 고기잡이 배의 숫자를 헤아리면 300척 이상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 마을에 약 20척 정도의 고기잡이 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배 한 척을 혼자 운영하는 게 아니었으니 한 척 당 함께 승선하여 동업하는 사람을 최소 두 사람으로만 잡아도, 600명 이상의 어부들이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이는 가장 적게 계산했을 때의 어부의 수입니다. 

생각이 이쯤 미치게 되면, 한 가지 질문이 본문의 수면 위로 살짝 떠오릅니다. “많은 어부들이 있었는데, 주님은 왜 그들은 안 불렀을까? 왜 하필이면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였을까?” 다른 어부들이 “왜 우린 안 불러 줍니까?”라고 하면 주님도 난감해 하지 않으실까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물 다루는 솜씨로는 베드로보다 더 뛰어난 어부들도 많았을 것이고, 잡은 물고기를 흥정하는 능력으로는 야고보 요한의 가정보다 더 나은 자들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적임자는 주님과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밖엔 없겠지만, 지금 그들이 들려주는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우리 스스로 묻고 대답하며 답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이 ‘그들만 부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그들뿐’이었다고. 그렇습니다. 그날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모든 어부들을 향해 베드로 형제들을 부르신 것과 똑같은 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잡은 물고기 헤아리는 일에만 정신이 가 있었고, 다시 호수에 나가 던질 다음 번을 위해 그물 손질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응답하기까지 아무도 잡은 물고기 숫자 헤아리기를 멈추고 그 말에 귀를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시 어떤 형제가 응답하듯, 그 말을 자세히 들어 보고자 배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말에 그들은 “네가 뭔데?” 했을테고, “사람 낚는 어부되게 하겠다”는 말엔 “물고기 한 마리 잡아보지 못한 녀석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람을 낚다니, 사람이 물고기라도 된다는 말이야?”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그 속에 우리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비웃는 사람들 속에서 마침내 응답하는 어부들이 하나 둘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라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날 그들의 응답은 교회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고 역사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아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대함은 이렇게 응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기들을 안 불러 준 것에 항변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안 부른 게 아니라 너희가 응답하지 않았잖아?” 

오늘 우리의 신앙 상황, 교회 생활도 그때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던 주님은 지금도 다니고 있습니다(18절). 현재분사로 말하는 ‘다니셨다’는 말이 특별합니다. 마태는, ‘부르시는 주님은 그때 잠깐 다니고 말았다’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부르고 계시며 찾고 계신다”고 하는 마태의 음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신 주님이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들리십니까? 

장대영 목사

<안강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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