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심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안되고 미·소 간 새로운 냉전체제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공산군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불법 남침한 것은 심각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는 ‘코리아’ 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차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또한 소련의 세계 공산화전략이 동유럽뿐 아니라 아시아로 확대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기에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여러 가지 구상과 전략이 순식간에 뇌리에 꽉 차게 되었다.
따라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현지시간)에 유엔 안보리(安保理)소집을 요구했다. 한국전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 안보리는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 영, 불, 소, 중(자유중국) 5개국의 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임이사국은 각각 거부권(拒否權)을 갖고 있어서 어느 일방이 국제평화를 해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마련된 기구다.
그런데 이 회의에 거부권을 갖고 있는 소련대표 말리크가 불참했다. 소련 대표가 불참함으로써 ‘거부권 없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참전을 요구할 수 있었다.
외교가에서는 소련 대표가 불참한 이유에 대해 모두 궁금해 했다. 소련 대표가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군의 참전도 불가했을 것이고 또 UN군의 참전도 불가하여 북산 공산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불참했느냐 하는 것에 의구심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 혹은 배탈이 나서 참석 못했을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교과서에서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소련 대표가 불참한 이유에 대해 수수께끼 모양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필자는 6.25전쟁사를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소련의 기밀문서를 빠짐없이 수집해 왔는데 소련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다. 즉 비밀문서에 의하면 1950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고트발트’가 스탈린에게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스탈린의 대답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군이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싸우게 될 텐데 중공군은 강하여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이에 대응한 미군도 중공군과 싸우느라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게 된다. 그때 미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소련은 유럽을 침공하여 공산주의를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스탈린이 크게 착각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러도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스탈린의 뇌에서 잔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다. 스탈린이 생각한 전략은 ‘악수(惡手) 중의 악수’였다. 왜냐하면 안보리에 참석하여 간단히 손 한번만 들고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군과 UN군의 참전을 막고 쉽게 남한을 적화통일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탈린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이 3번씩이나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을 때, ‘허락’하면서 탱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투장비를 지원하고, 또 북한의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17-18세의 학생들 중에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소련에서 6개월간 장비 조작법과 군사훈련을 시켜 전쟁에 내보냈는데, 어째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도록 내버려 두셨지만 즉시 스탈린의 뇌를 조정하셔서 번민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을 겪게 하신 다음 스탈린이 크게 착각하여 ‘악수’를 두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즉 거부권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이것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