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란 비진리(非眞理)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실의 세계이다. 자연계의 현상을 보면, 나일강이나 양자강이나 모든 강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빛은 수억 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직사하면서 어둠을 물리친다. 인간 세계의 현상을 보면, 순리(順理)와 역리(逆理)와의 싸움에서 순리가,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이런 현상은 당장 보기에는 술수 좋은 악인들이 출세하고 득세하여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악인은 망하고 의인이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주의자인 탈레스(Thales)는 우주 생성의 기원을 물이라고 했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그것을 공기라고 했다. 또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그것을 토(土)‧수(水)‧화(火)‧풍(風)이라고 했으며, 데모크리투스(Deocritus)는 그것을 원자(原子)라고 했다. 소피스트적 인문주의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절대적 진리는 없고, 이 세상에는 주관적 인상 이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는 힘이 정의라고 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Socrates)는 보편적 진리는 반드시 있으며, 진정한 행복은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증론(Apologia Socratis)』에 의하면, “진정한 행복은 부‧권력‧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세계에 있다고 하였다. 나는 천번이나 죽는다 하더라도 내가 가는 길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으신 데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가시면서 십자가 상에서 자기에게 못 박는 로마 병정들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의 진리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그를 배반한 가롯 유다 대신 사도가 된 마디아를 비롯한 11제자가 모두 순교의 길을 갔다. 사도 요한은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도 살아있는 순교자나 다름없는 ‘고난의 길’을 갔다. 특히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여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순교는 생의 순간의 삶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이기에, 오고 또는 오는 후세인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 주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18)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높아지기 위해서 피나는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을 자행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벌고 출세를 해서 얻은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과 사망, 그리고 허망뿐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거짓과 불의를 계속 자행하는 길을 가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 길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길이요,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가는 축복의 길을 스스로 파괴하는 길이기에, 하루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사후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되돌아보면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향하여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