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291)존 데이비슨 록펠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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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록펠러 의학 연구소’는 록펠러가 처음으로 세운 독립적인 자선 기관이다. 그가 수년 동안 기도하며 준비해 온 이 연구소는 그의 첫 손자가 병으로 사망한 직후에 창설되었다. 그가 순차적으로 6천 1백만 달러를 기부한 이곳은 미국 최초의 순수 의학 연구만을 위해 세워진 의학 연구소였다.
이곳에서 따뜻한 온도로 십이지장충을 박멸시키는 방법을 발견했다. 록펠러는 그 이외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록펠러 기금을 발족시켰다.
주정부는 1913년, 뉴욕은 마침내 ‘전 세계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록펠러 재단을 인가했다. 새로운 록펠러 재단을 점진적으로 1억 8천 3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그 이익금으로 세계 평화 운동에서부터 애비 록펠러가 주관하는 협회인 뉴욕 현대 예술 박물관과 초기 영화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특히 정신과와 분자 생물학 부문에 투자했다.
실제로 이 연구소의 업적으로 창설 후 4년이 못 되어 초대 연구소장 시몬 프렉스너 박사가 뇌막염의 치료제인 혈청을 개발했다. 또 혈액형과 격리된 항생물질을 발견했으며, DNA가 유전적인 형질을 전달한다는 것과 바이러스가 암의 원인이라는 점도 밝혔다. 이 연구소의 의사들 중에서 19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게이츠 목사와 록펠러 2세가 연구소 이사가 되었고, 후에는 록펠러 자선재단의 이사직을 맡았다. 록펠러는 이들이 연구소를 운영하는데 자유를 주려고 이곳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게이츠 목사는 ‘록펠러 회장은 연구소가 이뤄낸 공적과 또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라고 했다.
의료사업에 많은 기부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약품들이 발명되었다. 무엇보다 록펠러가 미국의 골칫거리인 의료보험제도가 형성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록펠러 재단의 돈이 그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의학 기술 발전을 유도하고 의료 서비스 업계를 다른 상업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
게이츠 목사는 30년 넘게 록펠러가의 자선사업 책임자로 일했다. 록펠러의 적성구조가 진실한 자선 사업가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였다. 게이츠 목사는 잘 생긴 얼굴에 곱슬머리를 한 배우 같이 화려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를 록펠러는 교회에서 데려와 자신의 자선기금을 관리하게 했다. 그는 뉴욕 토박이로서 목사의 아들로서 자신도 침례교회 목사가 되었다.
단정한 외모에 간결하게 말하는 록펠러와 긴 머리에 감정이 풍부한 게이츠 목사 간에는 성격 차이로 긴장감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신앙심과 재물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게이츠 목사는 자선기금을 관리하면서 많은 사기꾼들이 록펠러의 돈을 잘못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원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문서화 된 지원서를 받고, 그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지원자와 면담한 후 록펠러에게 추천했다.
게이츠 목사는 당시 좀 산만하게 이루어져 있던 록펠러의 개인 투자 포트폴리오를 넘겨받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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