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전대학에 들어간 1963~1964년에는 대학가에 대학생 성경연구회(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단체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대전의 한미성 교수와 광주의 배사라(Miss Sarah Barry) 선교사 중 누가 이 일을 먼저 시작했는지 또 공동으로 시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교수는 영문과 학생 지도뿐 아니라 UBF의 일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어서 나는 이 일에 동참했다. 나는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진리에 따라 내 가치관을 바꾸어가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 이끌어 오는 데는 매우 서툰 사람이었다. 그래서 UBF라는 단체에 대학생들을 인도해 오는 것도 잘 못했다. 외국 사람이 영어로 성경공부를 가르치니 함께 모여 영어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하자는 정도였다. 그러나 UBF의 목표는 대학생들이 바른 성경공부로 참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대전의 모임은 2, 30명으로 미미했는데 광주의 배사라 선교사가 인도하는 UBF는 300명이 넘으며 독자적인 회관도 가지고 있다는 차등 의식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전의 회원들도 광주의 수련회에 참가해서 자기들을 본받으라는 도전을 해오기도 했다. 그곳은 신학대학원을 마친 강도사가 전임으로 뛰고 있었는데 전도할 만한 학생 하나만 만나면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서 죄를 회개하자고 말한다고 한다. 죄가 뭔지도 모른 사람을 붙들고 그렇게 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이 어리둥절하고 있으면 강도사는 자기의 체험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상대방도 동감하고 눈물로 회개를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뒤 강도사는 서로 붙들고 울며 기도하는데 떠날 때는 형제는 앞으로 울지 말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카타르시스가 되어 주님의 일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그 학생은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어떨 때는 너무 심취해 등록금을 회관 운영비로 전부 바쳐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유대가 서로 비밀을 나누어 가진 공범의식에서인지 아니면 진정한 신앙의 결단에서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언제나 감성은 지성을 압도한다.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이성적인 지식이 아니고 감성적 의지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결속된 한 단체가 된다. 회관에서 친목 모임은 서양식 다과가 아니라 한국 엿가락을 나눈다. 애국가도 부른다. 그들은 이렇게 주체적인 민족정신도 불어넣어 주어 300명을 만들었다.
1964년 1월 한 교수는 나에게 대전도 겨울 방학을 이용한 UBF수련회를 준비하라고 거금 36,000원을 주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내 한 달 용돈이 2,000원인 것에 비하면 곧 알 수 있다. 나는 일주일 전 한 교수 댁에서 여덟 사람의 임원들이 모아 2박 3일의 준비기도회를 했다. 끝나는 날 모두 돌림 기도할 때는 너무 열심이어서 끝나고 나니 기도한 시간이 2시간이 넘었었다. 충남대생으로 새로 임원이 된 사람이 있는데 아마 놀랐는지 그 뒤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기도 강행군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자신에게 외쳤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수련회를 성사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기독교 대학의 한 교목을 모셔 와서 수련회는 21일부터 4박 5일 은혜스럽게 마쳤다. 그러나 수련회의 열매는 많은 인원 동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모임을 어떻게 쓰려 하시는지 지켜보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교수는 미국으로 귀국하고 이 모임은 그 뒤 광주의 UBF에 흡수되었다. 이창우 강도사는 이제는 광주는 든든하게 섰으므로 대전을, 그리고 다음은 서울을 공략할 차례라고 말하더니 결국, UBF는 전국적인 단체가 되었다. 독일에 간호사가 파송되면 바로 그녀가 UBF 선교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세계적인 단체까지 되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