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 했다. 솔로몬 왕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은 헛된 것이라 고백하였다. 굳이 이런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느꼈던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한결같이 삶이란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도 권력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며 헛된 것이라는 고백은 바보라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고 절망만 가져다주는 돈과 권력을 찾아나서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이는 서부 개척시대에 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금광을 발견하기만 하면 인생은 대박이 날 것이라는 막연한 꿈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런 꿈도 싫다.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 여왕 이세벨의 후원을 받아 신대륙을 찾아 나선 것도 실상은 금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실제 그들은 금이 있는 신대륙을 찾았고 스페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금이 많은 나라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금이 스페인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음은 굳이 경제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네 인생의 문제에는 언제나 돈 문제가 걸려 있다. 그 돈의 끝에는 행복 보다 불행이, 희망보다 절망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모두 그 돈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라는 측면에서 다르지 않다. 돈이 권력이 되어버린 이 시대는 더욱 그렇다. 교회도 목회자도 실은 권력화 된 돈을 우상숭배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회는 커져야하고 그 성장의 끝에는 반드시 돈이라는 우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 권력과 힘의 원천으로부터 자유하실 수 있었을까? 얼마든지 돈과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사셨건만 어떻게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하실 수 있었을까?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난 후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 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 유혹을 박차고 다시 숨어드셨다.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유대인이 유월절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예수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모시려 했을 때에도 차라리 죽음으로 답하는 그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는가? 다름 아닌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다. 우리는 하루하루 그 예수를 묵상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수 앞에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고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그런 선배와 후배들이 주변에 있다. 그들은 어느 깊숙한 시골에서 숲속 작은 골방 하나를 짓고는 행복한 삶을 산다.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최소한의 먹을 것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이라면 그는 자유인이다. 그리스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가 되었던 아테네 피레오스 항구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라는 사람을 생각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고향 크레타 섬 그의 무덤 비문에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도 예수를 알았을까? 오늘 하루는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