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T. 플린은 ‘하나님의 황금’에서 록펠러를 ‘오늘날 가장 더럽지 않은 세계적인 대부호’로 평가했다. 또 B. F. 윈켈만은 ‘존 D. 록펠러’라는 책에서 ‘록펠러가 이룬 업적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것이다.’라고 썼다. 콜롬비아 대학의 알렌 네빈스가 ‘존 D. 록펠러 : 미국 기업의 영웅시대’라는 제목으로 록펠러가 죽은 지 3년 후에 출판되었다. 1,430페이지로 방대한 이 책의 끝부분에 네빈스는 록펠러에 대해 ‘천재적인 조직력에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끈기, 예지, 그리고 과단성 있는 그의 성격으로 록펠러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썼다.
많은 작가들이 끊임없이 록펠러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데이빗 프리만 호크는 ‘존 D.’라는 책에서 ‘록펠러는 엄청난 재산을 벌기 위해 때로는 속이고 거짓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모든 미국 기업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론 셰르나우는 1998년 많은 갈채를 받은 <타이탄>에서 ‘록펠러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좋은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록펠러의 선행을 기억하고 그를 기뻐하셨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유력한 정치인 제임스 A. 팔리는 록펠러를 ‘위대한 비전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라 평했으며, 그의 주요 적수였던 법원의 사무엘 언터마이어는 ‘세계 제일의 시민’이라고 했다.
록펠러는 자신의 자서전을 읽지 않았다. 90세에 그의 몸무게는 40킬로도 못되었다. 승마, 산책 골프를 하는 시간도 줄였다. 이제는 간호사와 산소 탱크가 필요했고, 항상 의료진들이 그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있습니다. 정말 나는 백 살까지 살고 싶어서요.’ 그는 손님들을 맞아 대화를 나누었고 손수 집안을 개조하는 지시를 했다. 5월 22일 그의 98번째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는 유클리드 애베뉴 건너편에 있는 클리블랜드의 새 예배당 저당금을 갚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곧 사망했다. 그 때가 1937년 5월 23일 새벽 4시 5분이었다. 그날은 록펠러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주일이었다. 죽기 몇 년 전, 자동차의 천재 헨리 포드에게 ‘우리, 천국에서 만납시다.’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스탠더드 석유 회사는 묵념하는 5분 동안 상업 거래를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관은 레이크 뷰의 지하 콘크리트 돔에 안치되었다. 이리하여 아내 로라와 어머니 엘리자 옆에 잠들었다. 주위에는 수많은 그의 친구들과 경쟁자, 적수들이 묻혀 있었다.
록펠러의 재산은 2천 6백만 달러 정도였다. 많은 액수가 큰딸 외손녀인 마가렛 스트롱에게 주었는데 큰딸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탓에 유산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록펠러는 5명의 자녀와 15명의 손자·손녀, 11명의 증손자·증손녀가 있었다. 그의 아들 록펠러 2세는 1960년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생전 가끔씩 ‘존 D. 록펠러는 아버지 단 한 분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