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의 한 구절이다. 우리나라 국화(國花)로 민족과 역사를 함께해 온 나라꽃에 대해 알아본다. 세계 각 나라의 국화 역사는 200년 안팎이다. 18-19세기에 국가의 상징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각국은 근대국가를 형성, 민주주의 확산과 대중정치 출현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우리나라도 1880년대에 국가상징 제정이 이루어졌다. 국기(태극기)는 1883년, 대한제국때 애국가는 1902년에 제정, 공표됐다. 그러나 무궁화는 이미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를 槿花鄕(무궁화 나라)이라 불렀다.
신라 효공왕 원년 (A.D,897)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낸 국서(國書)에 ‘근화향의 염치와 예양이 스스로 침몰하고 발해의 독기와 심술은 더욱 성할뻔 하였다’(則必槿花鄕廉讓自沈楛矢國毒通愈盛)라는 기록이 발견된다.(동인지문사륙/동문선/동사강목) 신라는 국호대신 ‘槿花鄕’으로 국호를 대신했다. 이는 고려때도 이어졌다. “고려때 표사에 본국을 근화향이라 일컬었다.”(高麗時表詞稱本國爲勤花鄕)는 기록이 전해온다.(지봉유설/해동역사/동사강목/중보문헌비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600년대 초부터 외교문서를 집대성한 「동문휘고」에도 우리나라를 ‘槿花之鄕’, ‘槿鄕’, ‘槿域’ 등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나라 호칭을 ‘조선, 삼한, 해동, 좌해, 대동, 청구, 근화향’ 등으로 일컬어왔다. 특히 ‘근화향(槿花鄕)’은 국가간 공식 외교문서에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국가상징 무궁화의 연원은 다른 나라의 나라 꽃 지정에 비해 약 900년이나 앞서 있어 그 기간이 약 1,100년 이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무궁화에 관련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근려(槿籬)’ 즉, ‘무궁화 울타리’라는 말이다. 생활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조선 전기 문신(文臣) 서거정은 11편의 시에서 무궁화 울타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문인인 장혼은 「이이엄집」에서 울타리로 쓰이는 무궁화의 식재 방법을 소개하고 있고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노후 생활공간 조성에 무궁화를 사용한 예를 기록했다. 조선 중기 문인 구봉령의 시 “남원 성원 신창리를 지나며”에서 ‘순박한 풍속에서 백성의 삶이 보이고 무궁화 울타리 속 초가가 시내 안개에 비치네’(淳朴遺風見民俗, 槿籬茅屋映溪煙)란 구절이 나온다. 이런류의 기록은 서거정, 강석덕, 성혼, 신흠 등 당대 문인들의 시에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한편 조선후기 문신 홍양호가 1799년에 작성한 ‘토우기’에는 처음으로 ‘무궁화 삼천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무궁화에 국가 영토 개념이 추가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문헌엔 무궁화가 민족, 국가, 한반도, 독립 등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영토’란 것이다. 무궁화 울타리에서 출발해 ‘고향’의 개념을 거쳐 ‘우리나라 영토’를 의미하는데까지 발전했다.
무궁화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이르러 여러 문헌에서 국화(國花)로 언급되며 국가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국가의 상징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국민과의 관계를 통해 상징성을 획득한다. 상징은 문화의 산물이며 인간과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5,000여년간 우리 겨레 옆에서 피고 지는 역사를 지녀왔다. 이것이 바로 150년이 채 되지 않은 상징물인 태극기나 애국가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귀중한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매천 황현이 자결할 때 남긴 절명시에 ‘무궁화 나라’(槿花世界)가 언급돼 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무궁화 동산’을 외쳤으며(1925). 윤봉길 의사도 의거 이틀 전 유작시에서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의 독립을 염원하는 광복가를 지었다(1932). 김좌진, 안중근, 한용운 등 선열들도 무궁화를 아껴왔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