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폰 주트너 여사의 주선으로 국제기자회견
폰 주트너 여사는 1905년 12월에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2차 만국평화회의의 개회식은 아주 단조로웠다고 적고 있다. 참가국이 1차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지만, 열기는 없었다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만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폰 주트너 여사는 이번에도 평화주의자이자 유명 기자인 스테드(Stead)와 손을 잡고 평화회의 내용을 신속하게 외부 세계로 알리고자 신문 《만국평회의보,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을 발간하였고, 발행인으로서 칼럼을 쓰고 재정을 부담하였다. 폰 주트너는 시오니즘 창시자이자 이스라엘 독립국가 창설을 주도하는 헤르츨(Theodor Herzl)과 함께 1차 만국평화회의 전부터 교류를 가지면서 소수민족의 독립에 큰 관심과 동정을 보이고 있었다. 회의장 밖에서는 예를 들면 유럽 내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反유대주의 문제, 얼마 전에 바쿠(Baku)의 인종학살, 280명의 노동자를 즉결 사형한 아르메니아 문제 등 소수민족분쟁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회의장 주변에 상주하고 있던 스테드 편집장 겸 기자는 대한제국 대표단이 입장이 되지 못하는 소란을 목격하고 이들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폰 주트너와 스테드는 약소민족인 대한제국 대표단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세계에 알릴 수 있게 국제기자회견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위종 특사는 도착 이틀 후에 수려한 문체로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성명서(1907.6.27.)를 발표하였고, 이것은 만국평화회의보 6월 30일자로 실려 각국 기자단에 배포되었다. “(중략) 여기서 일본인들의 수단과 방법을 폭로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관대한 중재를 허용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로 성명서는 끝을 맺고 있다. 특사단은 1차 만국평화회의 때 상설된 국제중재재판소에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이 여전히 독립국이기에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위종 특사는 당시 제정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공부를 하여 7개국에 능하였다고 한다. 출중한 외국어 실력, 국제적 감각과 지식 그리고 귀족적 품위를 갖춘 이위종과 인터뷰한 내용을 스테드 기자는 7월 5일자에 ‘축제 때의 해골’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하였다. 인터뷰 중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이위종은 “대한제국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조약(1905년 한일조약)은 무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불법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이번 회의에서 제외되었단 말입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약소국 조선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면서도 스테드 기자는 “이위종은 열정적인 신념으로부터 관대한 착각으로 빠져들어, 기정 사실화된 것을 비웃고 있다. 그는 운명이 조약에 서명한 것을 조롱하는 의문부호이다. 특히 그는 평화의 회의 문턱에서 방황하면서 빈정대는 메피스토펠레스 즉, 부정의 영혼인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7월 8일 대표단은 한 번 더 국제기자클럽에서 회견을 하였고, 이 내용은 8월 22일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지에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장문의 내용 중 일부 발췌한 다음의 내용에서 당시 특사단의 울분과 자조, 현실과 동떨어진 법과 정의에 대한 기대감과 처절한 호소 등을 느낄 수 있다. “(중략) 특히 한국에서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일본의 진지한 약속을 믿고 동맹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또 러·일전쟁 시 일본을 다방면으로 후원했다. 우리 한인들은, 구한말의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지친 나머지, 그 반사작용으로 일본인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었고, 심지어 그들에게 기대를 걸기까지 했었다. 우리는 심지어 일본이 한국의 부패한 정치와 관료제도를 개혁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크게 기대했었다. (중략)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원통하게도, 일본은 모든 나라를 위하여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로,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적으로, 그리고 야만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 상동교회 집사 이준 특사의 순직
두 번째 공개 기자회견을 하고 일주일 후 7월 14일 이준 특사는 숙소인 드 용 호텔[De Jong Hotel(현 이준열사기념관 Yi Jun Peace Museum)]에서 숙면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평소 지병을 검진한 의사 소견서에 따르면)으로 향년 48세로 운명하셨다. 비분과 안타까움 그리고 너무 활동상이 없다는 이유로 이준 열사가 일본에 대한 항의로 자살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미화는 결코 그분의 숭고한 독립 의지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준 특사는 한양을 떠나기 전에 이미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서울 상동교회 집사였다. 이준 집사는 상동교회의 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1905년 을사조약 무효 상소운동을 전개한 바 등이 있어서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하여 고종은 이준을 선발했다고 보여진다. 상동교회는 민족독립운동가를 양성시킨 요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승만, 안창호, 이준, 신채호, 김구 등이 상동교회 출신들이다. 올해로 이준 열사 순국 114주년이 된다.
■ 돌아오지 못한 위대한 영웅 이상설, 이위종 특사
이상설 역시 1905년 을사조약의 인준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바가 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파견은 1905년 조약 위반임을 들어 고종을 강제로 하야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그리고 친일내각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에게는 무기징역, 이위종에게는 사형을 내려 끝내 이들은 귀국하지 못했다. 이상설은 귀국이 좌절되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덴버, 그리고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연해주에서 순직하였다.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도중에 아버지가 러시아 정부와 일경의 추격으로 권총 자살을 한 이후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뒤 러시아로 귀화하였다. 이후 1차 대전시 러시아 장교로 참전 중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은 헤이그 파견으로 일생을 달리하면서 모두 이국땅에서 독립의 일념으로 살아가다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지금까지 3인의 헤이그특사단에서 이준 열사만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면이 없지 않다. 이준과 이상설 특사는 외국어가 능하지 못하여 이위종이 아니었으면 이들의 활약상은 전혀 부각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설 특사는 가장 강인하게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제는 3인 특사에 대한 균형 잡힌 찬사와 경의를 표하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리라 본다.
■ 불멸의 평화주의자 폰 주트너와 스테드 기자
대한제국대표단의 활약은 폰 주트너 여사와 스테드 기자의 기자회견 주선과 보도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그냥 묻혔을 뻔했다. 아마도 역사에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폰 주트너 여사의 평화운동은 제1, 2차 만국평화회의장 밖에서 크게 기여했다. 최초로 체계적이고 국제적인 연대로까지 확산시킨 그녀의 평화운동은 오늘날 유엔연합(UN)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헤이그의 현 국제사법재판소도 그녀에게 신세를 진 셈이다. 대한제국대표단 역시 그녀에게 큰 신세를 졌다. 평화주의자 스테드 기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있을 국제회의의 기조연설을 하러 처녀 출항하는 타이타닉호(Titanic)를 타고 가다 배가 침몰하면서 배와 함께 1912년 4월 15일 운명을 달리했다. 코로나 전 2017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체코 방문이 415,5550명이며, 아마 이들 대부분이 프라하 광장의 얀 후스의 동상은 보고 사진도 찍었을 것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대한제국 대표단의 존재를 역사에 알린 킨스키 궁전 입구 안에 있는 폰 주트너 여사의 부조상을 보면서 고마움을 표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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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훈 목사
– 오스트리아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 칼럼니스트
– 공저 :『 Dokdo und Ulleungdo(독도와 울릉도, 동북아의 키워드)』
– 비엔나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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