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무색해진 38선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를 남겼다. 이 책의 다른 제목은 「6.25와 이승만」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남정옥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이승만 대통령의 6.25 비망록으로 “대통령의 경무대 일지”이자 “전시통치사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 목표와 북진통일 의지’를 따로 설명하면서 이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했다. “북한의 전면 기습남침에 의해 불가피하게 6.25전쟁을 맞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국가지도자로서 취해야 될 조치를 취하며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가 전쟁 초기 위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으로서 국가수호를 위해 판단하고 내린 조치는 크게 4가지다.
첫째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한국인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의 불법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38선을 북한이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 없다는 것이다. 넷째는 북진통일 달성을 위해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얻어야겠다는 것이다.”
2. 이승만, 인위적 38선이 무너졌음을 고지하고 북진통일을 역설하다
1949년 6월 30일, 6.25 남침 일 년 전, 미군은 오십 명 정도의 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한반도 남쪽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런데 이 미군을 결국 김일성이 6.25 남침으로 신생대한민국을 침략함으로써 불러들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긴박한 대미외교의 결과 미국과 유엔의 참전이 결정, 진행되자 이승만은 38선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다음은 「6.25와 이승만」 1950년 9월 23일자의 기록이다. 즉 9.28 서울 수복을 앞둔 대통령과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사변 이후 처음 가진 회견에서였다. “사상적 대립은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처음부터 38선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여태껏 참아온 것은 국제적 관계였는데, 이번에 공산군이 이 선을 넘어 불법 남침한 것이니 자연히 없어졌다. 그것은 소련이 북한 괴뢰군을 남침시켜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 했으나 유엔 민주진영이 우방을 살리기 위하여 일어남으로써 국제전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한국전쟁이 아니고 국제전쟁이다.”
그로부터 4일 뒤 서울 수복 하루 전 일자의 기록은 이러하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나 38선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며, 우리나라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것을 늘 강조해왔다. … 워커 장군은 어제 우리 국군을 찬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정일권 장군에게 38선은 연합국의 결정에 의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단 한 발짝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미 정 장군에게 한국군의 북진명령을 내린 후였다.” 38선은 인위적인 것이요 한반도 전체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우리나라 땅임을 국부 이승만은 분명히 한 것이다.
류금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