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세상을 건강하게 변화시켰던 분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발견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담대히 그 일을 행한 것이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것이 소명(Calling)이라면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며 희생하는 것은 용기(Courage)이다. 역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소명만 있어도 안되고 용기만 있어도 안된다. 소명과 용기가 둘 다 있어야 한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명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인생을 소모한다. 유명해져야만 할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같아지지 않아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일이 있다. 소명은 지문과 같은 것이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가식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조건 기쁘게 해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가식없이 사랑할 자유가 있을 뿐이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너무 많은 일을 이루려고 하다 시간에 속박된 인생을 산다. 주어진 시간에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가능한 한 많은 일을 이루어 내겠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다. 소명은 나이들지 않는다. 직업에서 은퇴하여도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은 가능하다.
또한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발견한 소명을 용기있게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으면 소명을 버리고 사람이나 상황에 이끌린다. 소명을 따라 살려면 때로 다른 것을 내려놓고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는 ‘The Courage to be(존재를 향한 용기)’라는 책에서 “진정한 용기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용기”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가는 용기”이다.
사람과 상황에 이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소명에 담대하게 헌신하는 용기가 있을 때 인생은 참으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게된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음모를 예수님께 알려드렸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심으로 용기있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바울에게는 성령께서 감옥과 고난이 기다린다고 증거해 주셨을 때 성령님의 증거를 피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연료로 삼았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분들은 소명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담대한 용기로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의 인종차별과 맞서 싸우면서도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은 분이다. 20년 넘게 감옥생활 후 그가 대통령이 되고 1년 후 1995년 럭비월드컵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흑인들은 대표선수가 모두 백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이유로 응원을 거부하였다. 그때 만델라는 자신이 직접 선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와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백인들로 구성된 대표팀을 응원하였다는 것이다. 눈치보지 않는 지도자의 소명을 향한 용기있는 행동에 백성들은 움직였던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소명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때로 자신의 위치도 내려놓을 수 있고, 때로 대중의 인기도 내려놓을 수 있고, 때로 자신의 생명도 내려놓을 수 있는 소명을 발견했는가?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