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는 가까운 지인에게서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받았는데 그 사진에는 영어로 된 짧은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사경을 헤매던) 93세의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회복이 된 후, 산소호흡기 1일 사용료가 그 할아버지에게 청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청구된 내용을 보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사는 그 노인에게 청구서로 인해서 우시지 말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이어서 그 노인이 하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의사가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이 한 말인즉슨, “나는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오. 나는 그 돈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요. 내가 우는 것은 내가 살아온 지난 93년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산소(공기)를 마셨는데 나는 그 댓가를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당신의 병원에서 산소호흡기 1일 사용료로 5,000 유로(한화 약 500만원)를 지불해야 한다면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이전에 나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오.”
93세 노인이 흘리는 눈물에서 하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봅니다. 노인의 놀라운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겨우 하루 동안 사용한 “산소(O₂)”의 값이 500만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개하고 흥분하여 병원당국에 대하여 대들며 따졌을 것인데 이 노인은 지난 평생 93년간 주님이 주신 “산소”를 떠올리며 감격하며 감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감사는 깊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감사일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의 일화가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마을에서 열사람의 나병환자를 만납니다. 그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당시 나병은 전염성이 매우 크고 빠르다고 여겼기에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 것이었습니다. 낫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당시의 나병은 치유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었으므로 치료가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나병환자들이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이유는 제사장에게서 그 병이 없어진 것을 확인 받은 다음에야 그들은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고 가족들에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열 사람 모두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나병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열 사람가운데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는 주로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여 울고 있는데 나는 잘 되었다고 감사합니다. 남의 집 아이는 입시에 떨어져 낙심하고 있는데 우리 집 아이는 붙었다고 감사기도가 나옵니다. 남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감사는 ‘상대적인 감사’입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이기적인 감사’입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상대적 감사’에는 ‘상대적 원망’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감사’는 ‘상대적 감사’가 아니라 ‘절대적 감사’여야 합니다. ‘절대(絶對)’라는 말의 뜻은 “일체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특정한 사실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좋을 때도 감사요, 나쁠 때도 감사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절대적인 감사’가 평생 동안 우리를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
•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