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5:17-2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17)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18)
편견(偏見)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욥이 당한 재난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으로, 인과응보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간교한 사탄에게 욥의 신앙과 삶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욥의 사건을 자기 지식과 경험을 앞세워 인과응보라는 당대 교리와 신학으로 몰고 가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고난은 무조건 죄의 결과라는 것과 둘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라는 것과 셋째,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17-19)라는 엘리바스의 고난에 대한 정의와 대처 방법은 오늘 우리도 성경적인 것으로 알고 당연하게 적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는데 거기에 함정과 한계성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둘째,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 하나님이 아닌 내가 어찌 완전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며, 셋째, 기독교는 분명 신비성이 있지만, 그 신비적인 계시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체험과 계시에 대하여 확신이 있다 해도 주관적인 것을 일반화시키는데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충고가 좋지만 만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계시자인 것처럼 영의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죄가 교만이며 교만 중의 교만이 영적인 교만이라 하지 않는가요.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절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을 거짓과 감언이설로 현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에 교만할 것도 없는 존재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똥 묻는 개가 재 묻은 개를 탓하듯 자기 눈에 들보가 있음을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는(마7:3-4) 교만의 죄성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음을 잊지 말라 하신 것 같습니다. 욥이 엘리바스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있는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욥의 인내심은 불편하기 그지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내담자의 마음을 깊이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대화는 아무리 듣기에 좋은 말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며 더 큰 상처를 주고 위로 대신에 화를 심는 경우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아집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 최고의 종교지도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음을 지적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은 들어도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진리의 타협은 있을 수 없지만, 생명의 유연성을 잃어가는 경직된 종교화와 기독교의 혼이 없는 세속화된 종교문화가 상식이 되어가는 시대에 코로나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무엇인지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자각하게 하심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쉽게 답을 구하는 욥의 친구들이 아니라 욥처럼 고난 속에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겠습니다.
주님, 그동안 제가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내가 알고 경험한 것이라 하여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어린 아이에게라도 배우려는 마음과 우주의 섭리와 자연을 통해서 아침에 떠오른 태양과 아침에 맺힌 풀잎의 이슬방울과 저녁에 지는 꽃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안을 주소서. 마음의 여유가 없고 자기 분주함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하루하루 세월 가는 것을 헤아리며 사는 지혜를 주소서.(시 90;12)
김유수 목사
<광주 월광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