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의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미합중국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선포한 ‘노예해방 선언서’이다. 여기에 서명할 때 그의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평생 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일로 내 이름과 영혼이 역사에 길이 새겨질 텐데 서명할 때 손이 떨리면 앞으로 이 서류를 보는 사람들이 내가 주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아브라함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하딘 카운티에서 토마스 링컨과 낸시 행크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켄터키 주 하딘 컨트리에 있는 방이 한 칸뿐인 통나무 오두막이었다.
링컨의 조상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역사가들은 그의 조상 새뮤얼 링컨을 찾아냈다. 새뮤얼은 1673년 영국 노퍽에서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킹 햄에 온 섬유노동자였다. 그러나 링컨은 조상에 대해서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링컨을 알았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지역 민병대 대장이었으며, 버지니아 로킹햄에서 켄터키 주의 제퍼슨 마을로 이주했다.
켄터키로 옮긴 후 할아버지는 매복해 있던 원주민에게 습격 받고 1786년 아들 머디카이, 조시아, 토마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머디카이는 총으로 동생 토마스를 원주민으로부터 구했다. 법에 의해서 장남인 머디카이는 그의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토마스는 시골 켄터키의 시민이었다. 그는 농장들을 팔고 샀으며, 그 농장 중에는 ‘싱킹 스프링 팜(Sinking Spring Farm)’도 있었다. 그의 가족은 분리 침례교(Separate Baptists)에 속했었다. 그 종파는 도덕적 기준이 있어서 술을 마시거나, 춤추지 않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토마스는 켄터키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배심원 역할을 맡았고 토지의 가격을 측정하고 지역을 순찰하고 죄수들을 지켰다. 토마스는 600에이커(acre)의 농장과 여러 부동산과 가축들을 소유했었다. 그는 부자였다. 하지만 1816년에 잘못된 토지 소유권으로 인해 그의 땅을 잃었고 인디아나 주 페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는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치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남달리 흉내를 잘 냈고 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막힐 정도로 잘 외웠으며, 손님이나 이웃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목수와 농장 일꾼으로 전전하였다.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진심 어린 사랑으로 돌본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러나 링컨이 아홉 살 때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링컨의 새 어머니 사라 부시 존스턴은 링컨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대로 가르치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