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서 상주까지 (39)
그 김서방이 김재수이고 김재수의 고향이 상주 낙동이라면, 왜 후기 필사자는 김서방이 부산에서 상주로 돌아올 때 <일기 1차본>에 “그는 부산을 떠난 후 7일 만에 집에 도착했고”라고 한 언급을, <일기 2차본>에 “그는 부산을 떠나서 7일 만에 백원(白元)에 도착했고”라고 수정했을까? ‘집’을 ‘백원(白元)’으로 바꾼 일은 사소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아는데 많은 제한이 있어 안타깝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내막을 바르게 알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는 부산을 떠난 후 7일 만에 집에 도착했고”라고 쓴 <일기 1차본>이 배위량이 처음 쓴 일기라고 생각된다.
김서방이 김재수이고 낙동 사람이라면, 배위량은 1893년 4월 26일(수요일) 낙동에서 잠을 잔 후 1893년 4월 27일(목요일) 낙동에서 상주로 갈 때 영남대로를 통해 상주로 가는 길에 영남대로 상에서 가까운 거리의 마을에 살고 있는 김서방을 만난 후 다시 영남대로를 통하여 상주로 갔다고 보는 것이 노정상 판단할 때 맞는 이치이다. 배위량은 낙동에서 상주까지의 거리가 40리라고 했는데, 40리라면 낙동에서 상주로 가는 편도 길의 대충의 측정치이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낙동에서 백원(白元)(상주시 사벌면과 외서면 일대)을 거쳐 상주로 갔다고 가정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 만약 김서방의 집이 백원이라 배위량이 백원까지 가서 김서방을 만났다면, 낙동에서 백원을 거쳐 상주로 가든지 낙동에서 상주를 들렀다가 백원으로 갔다가 그날 다시 상주로 갔을 텐데, 그런 노정을 택했다면 40리라는 배위량의 기록에도 맞지 않게 된다.
그런데, 후기 필사자가 왜 ‘집’이란 일반명사를 ‘백원’이란 고유명사로 바꾸었을까? 그것에 대한 정확한 동기를 지금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상주에 낙동 출신 김재수란 김서방과 또 상주 백원 출신의 또 다른 김서방이 있었고 그 두 김서방이 병 때문에 부산에서 활동했던 양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하여 상주에서 부산을 각각 방문했다.
– 이 경우 배위량이 낙동에서 상주로 가는 길에 만났던 김서방은 어느 김서방인가?
– 상주 낙동 출신 김서방이 김재수이고 그가 나중에 김기원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는가?
2. 배위량이 낙동에서 상주로 가는 길에 만났던 김서방은 아래의 배위량의 일기에서 보자면 그는 병이 위중한 환자 같다.
그는 부산을 떠난 후 7일 만에 집에 도착했고, 며칠 전까지 몸져누워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세척기가 부서져서, 그는 상처를 세척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앉을 만한 방을 가진 이웃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친척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들은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김서방은 우리에게 식사하고 가라고 간곡히 권했는데,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와 함께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한 뒤에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김서방은 언덕마루까지 따라와 우리를 배웅했다.
불쌍한 친구! 그는 이제 얼마 살 수 없다.
그 김서방은 무슨 병이 있어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상주 낙동에서 부산까지 갔을까? 배위량이 “불쌍한 친구! 그는 이제 얼마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는 어떻게 그 병마를 이기고 부산으로 다시 가서 안의와와 함께 대구로 가서 안의와의 조사 겸 어학선생이 되었고 대구 경북지방의 최초의 조사 겸 대구제일교회의 초대 조사가 되고 대구 경북지역에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필자는 정통한 교회사가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위치에 있지 않다. 앞으로 영남지역 교회역사에 정통한 학자가 나타나 이런 문제를 연구하면서 정립해야 될 당위성과 필요성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넘어가고자 한다.
<일기 1차본>
그들은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일기 2차본>
그는 […] 우리를 약 15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에 사는 자기 친척들에게 소개했다.
윗글의 한글 구조적인 차이는 번역에서 오는 차이이기 때문에 큰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김서방이 살았던 마을이 <일기 1차본>에는 약 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고 <일기 2차본>에는 약 15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로 소개된다. 한편에서는 12채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15채의 마을이다. 이러한 차이는 번역상의 차이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차이는 번역의 오류이기 보다는 어느 편이든지 영어본에서 차이가 난다는 의미이다. 배위량이 제2회 순회 전도 여행을 나와서 일기를 두 번 썼기에 일기 두 개가 전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두 가지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1. <일기 1차본>을 대본으로 하여 필사자가 <일기 2차본>을 필사했고 필사하면서 실수로 12채를 15채로 고쳤든지, 나중에 답사하여 12채가 아니라, 15채인 것을 확인하고 수정했든지,
2. 그 반대로 실수로 15채를 12채로 고쳤든지 의도적으로 12채로 수정했을 것이다.
그 마을 호수가 12채인지 15채인지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확인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일기 1차본>이 <일기 2차본>을 필사할 때 보고 필사했든지 아니면 12란 숫자를 지우고 15란 숫자로 수정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일기 1차본>의 영어본은 가지고 있지만, <일기 2차본> 손으로 쓴 글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이상규가 번역하여 출판한 『숭실의 설립자. Dairy of William M. Baird 1892.5.18.-1895.4.27. 윌리엄 베어드 선교일기』. 베어드 자료집2에 타자를 쳐서 출판한 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문만 있어 그것을 정확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 몇 가지 이유로 <일기 1차본>이 수기로 쓰여진 배위량의 일기를 번역하고 출판한 <일기 2차본>보다 먼저 쓰여진 글을 대본으로 한 것일 것으로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고 나름대로 논증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김서방이 살았던 그 마을은 약 12채의 가옥이 있었던 작은 씨족 마을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정] 1761호 내용 중 “김서방이 김재수가 아니라면 김서방의 고향은 백원이고 김재수의 고향은 낙동으로 보면 문제가 간단하다.”를 “김서방이 김재수를 지칭하는 김서방이 아니고 다른 김서방이라면 그 김재수 아닌 김서방의 고향은 백원이고 김재수인 김서방의 고향은 낙동으로 보면 문제가 간단하다. 그렇다면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상주에서 부산으로 다녀 온 김서방이 두 사람이어야 한다.”로 정정합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