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 산동성 래양에서의 선교 과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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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사병순 목사는 딸 한 명뿐이었으며 래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교사의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커다란 기쁨이요, 부모 때문에 선교지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위한 전인격적인 배려는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목사의 자녀들이 역시 거리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저속한 말을 배워도 교육 방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선교사 자녀들은 가정에서 그런 대로 꾸려나간다고 해도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볼 때에 그럭저럭 꾸려나갈 성질의 일은 아닌 것이다. 선교사로 헌신하는 결심을 하는 것 이외에 선교사 생활 중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역시 선교사 자녀의 장래에 관한 일을 들 수 있다. 

김영훈 선교사는 1915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자녀교육 문제를 언급하였으나 그에 대한 방안은 마련하지 못하였다. 

산동 선교비 모금과 지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그 재정은 전국 교회의 감사헌금과 헌물로 충당하였다. 당시 사회 여건상 감사절 주일에 가장 많은 헌금과 헌물이 드려졌는데 그 액수와 비중으로 치면 교회운영에 있어서 1년 경상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액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국 교회가 보낸 감사헌금과 헌물이 중국 선교 재정으로 사용되었다. 각 교회의 헌금이 노회 담당자에게 보내지고 담당자는 그 재정을 총회 전도국으로 보내 예산책정과 집행이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은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만 재정 사용이 가능하였고 동일한 사역지에서 동일한 여건 가운데 사역을 시작하였으므로 서로간의 갈등이 생길 요소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선교 대상국과 지역, 사역 내용에 따라 선교사와 협의, 예산 책정, 집행, 결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김영훈 선교사와 그 동료들에게 지출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 3인의 팔삭월급 690원, 팔삭자녀금 143원, 어학선생 팔삭월급 117원, 김영훈 사병순 량씨를 도와준 것 50원, 선교사 여행비와 이사비 134원 12전1리, 응접실용비 19원52전1리, 가옥세금 200원, 특별비 78원86전8리, 수리비 198원34전9리, 전도비 12원82전4리, 김찬성씨 시찰여행비 62원 1전, 박태로씨 시찰여행비와 월급 291원79전 등이다. 

 

산동 래양의 조선 선교사들은 안식년 및 특별한 일로 허락을 받아 귀국하게 될 때마다 전국 교회를 돌며 선교활동 보고를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15년 귀국하여 선교보고를 하였지만 동료 사병순 목사는 본국 교회에 선교활동 보고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선교사역을 마쳤다. 

 

안식년 제도 및 선교사 규칙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2년 창립 총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1913년 가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나 선교사 파송규칙이나 규정 등은 문서화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안식년 제도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가 선교지로 나온 지 3년이 넘어가도 안식년에 대한 문제는 거론도 안 되었다. 

안식년 규정이 마련된 것은 김영훈, 사병순 목사가 선교지 산동성을 떠난 이후인 1918년에야 마련되어졌고 1918년부터 안식년 제도가 생겼으며 안식년 기간은 이후 매3년-매5년-매7년 등으로 변경되었다. 

기타 선교사 규칙도 19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제정, 발표되었다. 

1912년 총회 조직 이후 총회전도국은 중국 선교사로 적합한 인물을 선정하였는데 한국인 목사 가운데 중국선교사로 활동 가능성 있는 인물을 선정하였다. 

1913년 5월에 첫 선교사로 선택되어 파송한 박태로 목사는 황해도 재령읍교회 목사였고 사병순은 대리회나 평남노회에서 서기로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었으며 김영훈 역시 한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3년 5월에 박태로 목사를 먼저 선택, 파송하였고 선교지 중국을 답사하게 하고 현지 중국노회와 교섭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총회전도국은 박태로 목사에 이어 추가로 선택된 두 명의 목사를 함께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선교사 훈련부족과 선교사 규칙이나 규정 그리고 선교사 자녀교육이나 주거 외 복지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목표와 사역범위 그리고 현지 중국인교회와의 관계

1912년 창설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13년부터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중국인에게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하면서 역사적인 양국 기독교 교류의 문을 열게 된다. 

장로회 총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어 교회를 세우되 독립적으로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고 현지 중국 측 노회에 속하게 하겠다는 선교원칙을 정하고 중국 산동선교를 추진하였다. 

즉 장로회 총회는 선교사가 가서 일하게 될 상대국 나라 교회와 협력하여 일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김영훈 선교사는 1913년 가을부터 산동성 래양에 거주하면서 그의 선배 박태로 선교사 그리고 졸업동기 사병순 선교사와 중국어 공부, 문서전도, 감옥전도, 교회사역을 시작하였다.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선교사는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던 본국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 평북, 평남, 황해 노회원의 자격을 가지고 중국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1916년 9월에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선교사 3명이 중국노회로의 이명을 허락하게 된다. 

박태로 선교사는 1916년 봄에 질병으로 귀국하고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는 1917년 봄에 허락 없이 선교지를 떠나게 된다. 1917년 6월에 개최된 제12회 평남노회 회록에 의하면 평남노회 소속이던 사병순 목사의 이명증서는 이미 산동독회 즉 산동노회로 발송했던 것이다. 1916년 가을 총회에서 선교사들의 이명 건이 허락되어 해당 노회는 선교사의 이명증서를 산동노회로 발송한 것이다. 

물론 초기 3인의 선교사 이후에 파송된 선교사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방지일 목사는 중화기독교 산동이나 교동노회, 래양노회로 목사 소속을 옮기게 된다. 

즉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중국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은 중국노회로 이름을 옮기면서 본국 노회원 자격이 상실되고 선교현지 노회원이 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국 총회와의 관계는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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