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시를 썼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에 두셨나이다.” 세상에는 창조주의 영광이 가득하다. 놀라운 지혜가 빛을 발한다. 거리를 측량 못하는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광대무비(廣大無比)한 이 우주, 모두가 다 질서 안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깊은 계곡, 깎아지른 절벽, 푸드덕 날아가는 새들, 푸른 이끼들, 어느 것 하나도 경이롭지 않는 것이 없다. 꽃들 속에는 향기가 담겨져 있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엄동설한에도 푸르른 기상을 보인다. 바다 깊은 곳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태고의 신비와 고요가 있다. 태양이 쏟아내는 저 찬란한 빛, 이 빛이 있기에 만물이 살아 숨 쉰다.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해 주는 달빛은 어두운 밤에 신비를 자아낸다. 시인은 ‘하늘도 창조주의 영광을 담을 수 없다’고 노래한다. 저 많은 별들은 모두가 자기 궤도를 달린다. 은하계가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만 하다면 태양계의 크기는 커피 잔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가진 인식 능력으로는 태양계의 크기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무려 1천억 개나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주 끝까지 광속(光速)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무려 150억 년이 필요하다. 끝이 없다는 것이나 같은 얘기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이런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삶 자체가 위험과 재난에 늘 노출된 채로 살아간다. 태풍과 폭풍, 지진과 화산, 맹렬한 회오리바람, 노도와 같은 파도, 전쟁과 기근…!
헬렌 켈러는 사흘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세 가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어둠을 걷어내고 밤이 낮으로 변하는 장엄한 순간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한 순간순간이 경이롭게 살아있는 자연 앞에서 놀라움과 신비를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다. 조금만 묵상에 잠겨 있어도 세상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해도 이들에게는 지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별은 자신이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늘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비록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지만 창조주는 그 분의 형상대로 지성과 감성을 인간에게만 주셨다. 때문에 인간만이 창조주 신과 교제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으로만 창조주를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우주 공간에서 어둡고 적막한 고독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 신의 임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하늘은 장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양(羊)에게서는 인내의 교훈을, 비둘기에게서는 순결을 배운다. 개미와 벌에게는 부지런한 근면을 배울 수 있다. 바보처럼 보이는 소와 당나귀는 인간의 무지를 책망한다. 창조세계의 원리는 이 모든 피조물이 오직 사람을 위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들을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셨다. 인간만이 창조주 신의 생기를 부여받았다. 처음 인간 아담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을 향해 “너는 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인간은 밑도 없고 끝도 없는 은혜의 바다에 잠겨 있는 셈이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의 수한은 정해져 있다.
첫 번째 사람 아담과 이브는 창조주와의 약속을 어기고 명령을 거역했다. 죄악이 그의 마음 속에 찾아 들었다. 창조주와 약속된 화평은 깨어지고 말았다. 창조주와 인간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성육신(Incarnation)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피를 흘리셨다. 이 피를 인하여 화목이 회복되었다.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사소한 것 하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아웅다웅 싸운다. 도토리 키 재기에 목숨을 건다. 참으로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