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갇혀 있던 감방은 수십 명의 간수들이 교대로 두 사람씩 권총을 휴대하고 엄하게 경계하였으며 옆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외국인에게는 성경 반입이 허락되었는데 우리말과 영문으로 된 신구약성경이 주어졌으며 찬송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중노동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성경을 읽고 찬송을 웅얼거렸는데 우리말 성경을 5독하였고 영문성경을 1독하였으며 찬송가도 1장부터 600장까지 모두 불러보았다.
처음에는 수많은 간수들이 그를 감시하면서 고함을 지르거나 잔소리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간수들 중에는 조금씩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임목사가 성경을 읽는 모습이 매우 보기 좋다고 말해 주었으며 또 다른 이는 임목사가 자유의 몸이 되면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도 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는데 임목사의 국적이 캐나다라는 것을 알고서 “캐나다에 집이 있느냐? 집은 어떻게 생겼느냐? 자동차도 가지고 있느냐? 운전을 할 줄 아느냐?”등의 질문을 하였다.
하루는 간수 한 사람이 몹시 울적한 얼굴로 임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물론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그가 노동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었다. “집에 있는 아들이 자기에게 반발하면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하는 내용이었다. 임목사가 전에 읽은 어느 의사가 쓴 책의 내용이 생각이 나서 자녀들하고 가까워지려면 세 가지를 집중을 하라고 조언하였다. 첫째, 눈길을 주어라, 둘째, 손길을 주어라. 셋째, 집중적 관심을 주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번에 아들을 만나거든 눈길을 주고 손길로 어루만지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라고 했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단 하루의 휴가를 갖는데 집에 다녀온 그의 얼굴이 매우 밝았으며 아들과 좋은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기뻐하였다.
내 생일이 2월 16일인데 공교롭게도 김정일의 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그날 저녁밥 쟁반이 들어 왔는데 그 식단은 내가 그곳에서 먹은 약 3,000끼 중에서 딱 한 번 먹은 내용이었다. 평소에 없던 고기국이 있었고 반찬이 8~9가지에 이르는 이름그대로 진수성찬이어서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한번은 한 간수가 날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자기들만 쓰는 조그만 목욕탕이 있었는데 둘이 거기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는데 그 친구가 내 등의 때를 밀어주는 거였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임목사는 자신이 억류되었던 북에서의 949일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처참한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이 그의 생애에서 제일 축복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시간에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영점기준(zero-base)에서 만날 수 있었고 그의 믿음도 더 성숙해졌으며 그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면서 대화하였으므로 그곳이 그에게는 “완벽한 수도원”이었다고 회고한다.
캐나다 정부는 2001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북핵문제로 수교가 단절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북한과 연락할 수 있는 채널이 없어서 중립국인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북한과 협의를 시도하였다. 스웨덴 대사가 두 번이나 임목사를 면회하면서 캐나다 정부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결국은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특사단이 방북한 직후에 임목사의 석방이 이뤄졌다. 캐나다 정부는 임목사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총리전용 비행기 2대에 특사 14명을 파견했다. 건강 상태가 위급할 경우, 비행기 안에서 수술할 수 있게끔 현역 외과 여의사와 수술 장비 2대를 함께 보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고 했다.
한때 가수와 작곡가로 활동했던 주영훈(朱榮勳, 1969~ )씨 등 3인의 팀으로 구성된 CBS TV의 사회자들과 한 시간이 넘도록 대담하는 임목사의 얼굴은 시종 편안하였으며 어쩌면 북측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그에게서는 일말의 불편한 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북쪽 감옥에서 노트 1,400장에 달하는 일기를 쓰면서 어떤 때는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글씨가 지렁이처럼 구불구불한 것도 있었는데 한 장도 못 가져 오고 북에 빼앗긴 것이 제일 아쉽다고 하면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