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두 캠퍼스의 대학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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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문교부(앞으로는 교육부로 표기)의 인가를 받아 대전대학과 숭실대학은 통합하여 『숭전대학』이 되고 김형남 이사장이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형남 학장이 맨 처음 한 일은 대전대학의 유망주였던 전자공학과를 서울로 옮긴 일이다. 학교가 커져야 대전대학은 살 수 있다고 2년 전 연말에 힘겹게 교육부에서 신설 승인을 받은 학과였다. 그러나 공대가 서울에 있어서 대전에 새로 과도한 설비를 할 필요가 없어 한 대학이니 서울로 옮기겠다는 게 학과를 옮기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전대학의 어떤 구성원도 이에 불만이 없었다. 서울로 옮기면 학생들은 자연 선망의 서울 학생이 되고 교수는 서울 교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 대학이라는 명목으로 물리 전공 교수도 서울로 희망해서 옮겼으며 대전대학의 혜택으로 미국에서 영어학으로 학위를 받은 교수도 서울로 옮겨 갔다.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통합 당시 두 대학이 한 대학이 되려면 한 대학을 다른 대학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제3의 위치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캠퍼스는 하나로 하되 서울이나 서울 근교로 하자고 잠정적으로 합의된 모양이었으나 대전의 유지들이나 교수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건물은 서울 측이 많았지만, 대지와 교수 주택 등은 대전이 앞서 있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대전대학에서 은행에 예치해 놓고 재단에서 쓰고 있던 정기예금을 서울 측에서 빼간다는 소문이 조흥은행에 근무하던 대전대 졸업생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은행의 대리였다. 이유는 서울은 사채를 쓰고 많은 이자를 주어야 하는데 대전은 미련하게 정기 예금을 하고 작은 이자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한 대학인데 이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전일보의 기자로 있던 윤 동문은 지역사회 유지들과 상의하고 대전대학은 숭실대학과의 통합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신문에 냈다. 또 학생들도 통합을 분리하여 대전대학으로 환원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두 대학의 통합절차의 총책임을 맡은 전권위원은 한경직, 김형남(서울) 김형모, 타요한(대전)이었는데 이 일로 한경직 목사가 김형남 학장과 대전으로 내려와 상황 설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젊은 윤 기자는 한경직 목사의 명성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각종 욕설로 맞서서 한 목사는 평생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대전대학 교수도 통합하더라도 대전대학의 장학 제도와 도미 유학을 통한 교수의 자질 향상 등 많은 좋은 제도는 대전대학에서 유지돼야 한다는 강한 발언을 했다. 

결국, 두 대학은 한 캠퍼스로 통합하지 않고 서울과 대전에 두 캠퍼스를 유지하며 각 대학의 특색을 살려 운영키로 했다. 이사회는 정관을 개정하여 대전 캠퍼스를 존치 운영하며 양 캠퍼스의 행정기관에 동등한 권한을 주어 행정을 겸행토록 하기로 하였다. 이에 5월 10일 학생들은 정상 수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세상의 골리앗이 대학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나는 이 대학에서 새내기고 아직 자격 미달인 사람이어서 허둥대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먼저 석사학위부터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해 가을부터 충남대학교의 대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석사 과정을 먼저 마칠 생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현대문학이나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에 단편을 발표하였다. 작은 대학이어서 월간지 중 현대문학만 도서관의 정기 간행물 코너에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들여다보고 내 작품이 그곳에 나와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름이 난 소설가가 아니었고, 학생들은 그들 나름으로 불안한 대학의 미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 나는 소설가가 아니고 유능한 수학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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