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예장통합 총회의 표어는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이다. 너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위기를 만날 때 해결책은 본질에 있다. 지금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목회자인 내 자신이 복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나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사는 목사인가?
복음적인 삶의 반대에는 율법적인 삶이 있다. 예수께서는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지켜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5) 하셨다. 그들이 무슨 악독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의 겉모습과 속상태가 전혀 다른 것을 꿰뚫어보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적인 삶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지 모른다. 율법적인 신앙의 특징 중 하나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10년 20년 하면 충만해지고 자유로워지고 확신에 도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본질적인 믿음은 더 약해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돌아설 수가 없다. 덫에 걸린 새처럼 되었다. 율법주의의 덫에 걸려 있으면서 자신은 괜찮은 척, 충만함에 도달한 척 한다. 이런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연히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한다. “왜 새벽기도를 빠지는가?” “왜 옷차림이 그런가?”
코로나로 교회에 모이기 힘든 시기를 지나며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말씀과 기도의 개인 경건생활과 가정예배를 강조하였다. 감사하게도 많은 교인들이 잘 따라주셨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개인 경건생활과 가정예배가 율법의 행위가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목사는 교인이 성경을 많이 읽거나 가정예배를 잘 드리면 칭찬을 한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그 행위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어떤 교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며 슬쩍슬쩍 자랑하기까지 한다. “성경을 00독 하였어요” 그 행위의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교인은 심한 영적 열등감에 빠지기까지 한다. 이는 순전히 목사의 탓이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방문하셨다. 천사가 한번 씩 내려와 목욕할 때, 가장 먼저 몸을 담그는 병자가 낫는다는 연못이다. 거기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그 38년 된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것이 복음적인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다. 우리를 있는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복음을 거저 받으면 된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경쟁이나 실력이나 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그래서 복음적인 삶의 특징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자유로움이 있다. 말씀 그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이미 천국을 누리며 산다. 비교, 자랑, 교만, 열등감 같은 요소들이 없다. 목사로서 나는 주일 아침이 참 좋다. 우리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초월하신 그 시간이 우리로 복음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주 입으로 선포한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나를 기뻐하신다.” 나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목사이다.
이양재 목사
<명성비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