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교포 목회 (1)

Google+ LinkedIn Katalk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1912년)과 더불어 1913년에 시작한 중화민국(中華民國) 산동(山東)선교는 1917년 이르러 선교사 2명이 임지를 떠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총회 전도국은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의 선교지 무단 자퇴로 인하여 당황하게 되었으나 질병으로 귀국하여 치료 중에 있던 박태로 선교사와 평북노회 방효원 목사를 파견하여 우선 선교지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임시 전도인 김병규 씨를 단기로 파송하였으며 1917년 가을에 방효원 목사와 총회 부회장 홍승환 목사를 새롭게 파송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무단 자퇴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두 사람을 책벌하지 아니하고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산동 선교사로 갔던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3씨에게 위로하는 문안과 이후에도 주의 일을 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편지하되 회장과 서기에게 맡겨 하기로 동의 가결하다”

총회의 관대한 처분으로 징계를 면한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그의 동료 사병순 목사와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였으며 1917년 7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상항)에 도착하였다.

김영훈 목사가 타고 있던 ‘차이나’호에는 한인 리혜두, 리석원, 박영관, 김극로, 박영섭, 오정수, 김유신 등 여러 한인들과 미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몇몇 약혼자들도 동승하고 있었다.

1917년 여름, 미국에 도착한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상항 한인교회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된다.

“외국 전도의 사명을 받들고 중국 산동성에 건너가 제남 풍우에 목양자가 되었던 한인 선교사 김영훈, 사병순 량 목사의 상륙은 전보에 게재한 바 상항 한인교회는 외국 전도의 열쇠를 공경하여 칠월 삼십일 오후 팔시 삼십분에 1053 옥스트리트 한인예배당에서 목사 리대위 씨의 주례로 김, 사 량 목사를 환영하였는데 당일 의식은 기도 창가 연설의 순서가 있어 반주가 자못 만족하였다 더라”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중국 산동 선교지를 무단 자퇴한 신분으로 고국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으나 미국에서는 리대위 목사의 주례로 만족스러운 환영을 받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상항 한인교회의 환영과 배려로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다음 달 8월 29일에 열린 맨티카 지방 한인회 주최 국치기념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맨티카 지방 국치 기념일 행사는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개회되었다. 조국에서는 침략자 일제에 의해 식민 통치를 받고 있어서 꿈도 꿀 수 없는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다.

사병순 목사의 기도에 이어서 여학생들이 국치 기념가를 불렀으며 최능익 씨의 역사담이 있었다. 이 행사에서 김영훈 목사는 ‘장래희망’이란 제목으로 일장 연설을 하였다.

1917년 늦가을, 김영훈 목사는 상항 한인교회에서 성황리에 거행된 감사절(感謝節) 예식에 참여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청어(淸語) 즉 중국말로 연설을 하였다.

중국 산동 선교사 경력을 인정하여 특별 순서로 부탁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김영훈 목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말을 잘하는 한인 목사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1918년도 신임원에 들어가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미국에 거주하게 되면서 1917년 10월 9일 흥사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흥사단 제75단우(團友)로 이력서를 제출하였으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는 1917년 12월 8일에 선거를 실시하여 1918년도 신임원을 선출하였다. 임정구 씨가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부회장 김원서, 총무 하상옥, 서기 리살음, 재무 강천명, 학무원 백일규, 법무원 김영훈, 실업부원 황사선, 구제원 송찬균, 대의원 홍언 씨가 선출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8년 1월 2일에 거행된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총회장 및 부회장 취임식에 참석하여 임시주석 송종익 씨 개회 순서에 이어 대표기도를 인도하였다.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총회장 및 부회장 취임식은 1918년 1월 2일에 거행되었다.

총회장 리대위의 선서문 낭독에 이어 총회장이 성경에 손을 대고 목사가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으며 총회장과 부회장의 연설, 정인과 씨의 치하(致賀)의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리대위 총회장의 선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 리대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애하신 동포의 사랑으로 기원 4251년에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의 직임으로 피선되었으매 하나님의 도우심과 동포의 동력을 힘입어 임기 안에 충성과 정력을 다하여 우리 국민회의 헌장과 자체 규정을 준행하며 회원의 여론을 존중하여 중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를 이에 맹세하노라”

김영훈 목사는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총회장 및 부회장 취임식에서 대표기도 순서를 맡아 참여하였고 북미총회 제9회 대의원회 회의에서 의안 수정위원 3인(홍언, 송종익, 김영훈)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월 5일 개최된 대의원회에는 하변지방회 대의원 김순학 씨 대리로 참석하게 된다.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총회장 리대위는 1918년도 총회 임원 총무 이하를 대의회 승낙을 경유하여 1918년 1월 7일에 정식 서임(敍任)하여 다음과 같이 조직을 완성하였다.

“총무 홍언, 서기 최응선, 재무 황사선, 학무원 임정구, 법무원 김영훈, 구제원 최진하, 실업부원 리혜주”

대한인(大韓人) 국민회(國民會) 북미(北美)지방 법무원을 맡은 김영훈 목사는 1월 20일에 열린 부미지방 샌프란시스코(상항) 지방회에서 지방회(地方會)의 법무원 직잭은 사임하게 된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