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1337~1453)은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인 116년 동안의 장기 전쟁이다. 이 전쟁의 실제적인 원인은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의 봉토 영지권(領地權) 행사를 둘러싼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백년전쟁 과정에서 잉글랜드 도버(Dover)와 가장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 도시 칼레는 1347년 다른 해안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때문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 칼레 시민들은 합심 단결하여 사력을 다해 성을 지켰지만, 11개월을 버티면서 모든 것이 바닥이 나 결국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어렵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칼레 측 사절의 여러 번 요청이 있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조건을 내걸게 되었다.
‘칼레 시민 중 존경받는 여섯 명의 대표를 뽑아 모자와 신발을 벗고, 겉옷만 걸친 채 밧줄로 몸을 서로 묶고, 영국 왕 앞에 와서 칼레 성벽의 열쇠를 바치고,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는 통첩이었다.
칼레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항복 조건을 듣고 칼레 시민들이 절망하는 순간에 그 칼레시에서 가장 부유한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싸움에서 진 것이지, 우리의 얼과 넋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라며 “자원해서, 떳떳하게 죽자”고 나섰다. 그 다음으로 법률가 장 데르(Jean d’Aire), 존경받던 사업가 피에르 드 위쌍(Pierre de Wissant), 그의 동생 자크 드 위쌍(Jacque de Wissant), 칼레 시장 장 드 피엥스(Jean de Pinne), 청년 ‘앙드리외 당드레(Endrieus d’Andrieu)’가 있다. 이들은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되었다.
이런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때, 칼레 시민의 고위 귀족층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감동적 사실은 500년이 지난 1888년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 예술적으로 탄생했다. 6인의 영웅적 시민 상은 덴마크 코펜하겐, 영국 런던, 미국, 일본, 스위스 등 12개국에 똑 같이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삼성(호암) 갤러리에도 한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오늘날 칼레 시민의 사회 고위층과 같은 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너는 죽고 나만 살자”는 극단적 이기심의 사회적 풍토가 지배적이다.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뿐만 아니라, 칼레 시민들의 사회적 고위층들처럼 죽을 각오로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자신도 살고 공동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