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서 상주까지 (48)
필자는 배위량의 순회전도 여행길에 관한 일 때문에 그에 관한 글을 쓰지만, 역사학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전문적인 글쓰기를 할 전문지식도 부족하고 그런 여유도 없이 그저 배위량의 생애와 그의 사상 등, 배위량관 관련된 역사에 관심을 가진 성서학자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여기에서 글을 쓰는 것들이 전문적인 글이 되어 앞으로 배위량에 관한 지침이 될 수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필자가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길을 찾고 그것을 개발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하여 한국교회가 배위량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귀중한 자산을 발견하길 바라는 기대감으로 글을 쓴다. 그러므로 필자가 쓰는 글이 배위량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하나의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진다.
1893년 5월 1일 월요일 저녁에 예천 용궁(Ryonggyoon)에서 배위량은 상주에서 머물 동안에 일어났던 것들을 일기에 썼다. 배위량은 자신의 일기에 가끔 전날에 관한 일들을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1893년 5월 1일 월요일 저녁에 예천 용궁에서 기록한 일기는 모두 상주에서의 일을 기록한다. 1893년 5월 1일 일기를 몇 가지로 묶어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1. 배위량이 상주에서 지체하게 된 원인
일행 중 두 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 머물러 있었다. […] 나는 관리의 보호 하에 마부를 맡기고 상주를 떠나야만 했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열이 심했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우리의 경제적 형편으로도 상주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약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소년은 오한이 났으나 좀 괜찮아졌다. 상주에서 마부 한 사람을 충원했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
2. 배위량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지방관리에게 도움 요청함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어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주도록 이 지방 관리에게 요청해야만 했다. […] 관리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찾아왔고, 우리가 요청한 것을 들어주었다. 이들은 분명 외국인을 거의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
그에게 말 한 필을 7달러를 곧 670냥을 받고 팔았다.
3. 당시 상주의 인구
서씨는 이곳 사람들을 2만명으로 추산하였다.
4. 책 판매에 대한 기록
가능한 많은 양의 책들이 배포되었다.
위의 글을 보면 아래의 4가지로 구분된다.
1. 배위량이 상주에서 지체하게 된 원인
2. 배위량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지방관리에게 도움 요청함
3. 당시 상주의 인구
4. 책 판매에 대한 기록
이 4가지 사항을 기록한 배위량의 글은 당시의 사회상과 배위량이란 사람의 인물 연구와 상주란 도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먼저 배위량이 상주에서 지체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일행 중 두 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 머물러 있었다.
2. 나는 관리의 보호 하에 마부를 맡기고 상주를 떠나야만 했다.
3.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열이 심했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우리의 경제적 형편으로도 상주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약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4. 소년은 오한이 났으나 좀 괜찮아졌다.
5. 상주에서 마부 한 사람을 충원했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
배위량 일행은 상주에 4월 27일(목) 밤에 도착하여 5월 1일(월) 아침까지 상주에 머물렀다. 상주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이유가 일행 중에서 둘이 병이 들었는데, 한 명은 마부였고 한 명은 소년이었다. 그들은 고용된 사람이다. 배위량은 그 두 사람 때문에 상주에서 지체했다. 그 마부는 열이 심하고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팠다고 한다.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상주로 오는 동안 여행에 탈이 났던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을 움츠러 들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병이다. 두 사람의 병 때문에 전체가 며칠을 상주에서 지체했지만, 가지고 온 약도 얼마 남지 않았고 경제적인 형편도 넉넉하지 않아 더 상주에 머물 수가 없어 마부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형편이었다는 것을 배위량은 밝힌다. 소년은 “오한이 났으나 좀 괜찮아졌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소년은 배위량과 함께 상주에서 용궁으로 배위량 일행과 함께 움직였던 것 같다.
진퇴양난의 순간 배위량은 마부를 내팽개치지 않고 상주의 행정 관리에게 돌보도록 부탁하고 길을 떠났다. 있어야 하느냐, 가야 하느냐의 순간에 배위량은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고 그것을 실행했다. 여기서 “상주에서 마부 한 사람을 충원했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는 글을 보게 된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상주에서 고용된 마부는 월급제나 여행 전체 기간을 상정한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기존 마부가 병에서 고침을 받아 돌아 올 때까지 임시로 고용된 마부인 것 같다. 10리는 통상 1시간 동안에 걷는 거리이다. 10리에 10전을 주도록 계약되었다는 말은 시간당 10전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는 글 속에 부산에서 같이 출발한 마부가 병에서 나아 복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난다.
배위량의 지도자적인 품성이 전도여행을 위해 고용한 마부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배위량은 순회전도여행단의 수장이다. 마부는 그 전도여행단에 고용된 사람이다. 마부는 언제든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구할 수 있는 신분이다. 당시에는 여행자 보험이 없었을 것이므로 여행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문제에는 순회전도단의 수장인 배위량이 책임을 져야 했다. 마부는 고용된 인물이라, 배위량은 해약할 수도 있었겠지만, 배위량은 그 마부가 병 낫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병이 크게 차도가 없고 전도여행단의 형편이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므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배위량은 계약을 파기하거나 새로운 마부를 구하지 않고, 그를 상주에 남겨두고 임시 마부를 시간당 10전의 노임을 주고 구했다. 병든 마부를 그냥 방치한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도록 관청에 부탁을 하였다. 여기서 배위량은 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