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의산노회는 먼저 투표로 임원을 선거하여 회장 최명준, 부회장 김영훈, 서기 홍하순, 부서기 최득의, 회계 김학린, 부회계 김기범 씨가 신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0회 의산노회는 노회에 참석한 중국 산동 선교사 홍승한 목사에게 언권(言權)을 허락하여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
홍승한 선교사는 김영훈 목사의 뒤를 이어서 1917년부터 중국 산동 선교사로 산동 래양(萊陽)과 즉묵(卽墨) 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선교비 부족 문제로 선교사역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홍승한 목사는 김영훈 목사보다 신학교 선배였으며 1917년에는 대구 남성정(현 대구제일교회) 위임목사이자 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 시무하였던 인물이었다.
제10회 의산노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김영훈 목사는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이면서 의산노회 산하 운천, 창원, 소수, 청전교회 제직회장을 맡게 되었다.
의산노회 부회장 김영훈 목사는 1923년 9월 8일부터 신의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목사 총대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개회예배 기도를 인도하였다.
제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함태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총회 전도부는 중국 산동 즉묵 선교사 홍승한, 이대영 목사를 소환하자는 보고를 제출하였으나 중대한 문제인즉 다시 전도부와 각 노회장 그리고 지 회계에게 맡겨 신중하게 의논한 후 다시 보고하게 하기로 동의 체결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3년 9월 11일 오전 11시, 계속 진행된 총회 석상에서 요한복음 21장 1-17절을 낭독하고 ‘교역자 양성’이란 문제로 강도(講道)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총회 선교사로 선택된 후 1913년 9월, 경성 소안동 예배당에서 개최된 제2회 장로회 총회에서 계시록 3장 1-6절을 읽고 ‘열심 있는 체하지 말 것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10년 만에 총회 석상에서 다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3년 9월 8일부터 신의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산노회 목사 총대의 한 사람으로 처음 참석하기 시작하여 4년 후인 1927년 9월 9일 원산에서 개최된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1913년 총회 파송 중국 선교사 김영훈 목사는 1927년에 총회장에 당선되어 총회를 대표하게 되었고 중국 산동 선교를 총 지휘하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3년 9월 8일부터 신의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상비부 가운데 전도부 3년 위원과 산서노회록 검사위원으로 선정되었고 림준철(林俊哲) 목사, 라자승(羅子承) 장로와 함께 의산노회 재단 실행위원으로 보고되었다.
제12회 장로회 총회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피해를 위문하기로 동의가결(同意可決)하고 김영훈 목사, 경충노회의 박용희 장로를 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 지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2천 명 이상, 3만7천 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큰 사건이었다.
장로회 총회는 위문서를 총회장 함태영 목사와 별위원 김영훈, 박용희(朴容羲) 이름으로 일본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에게 발송하였다.
“산명해소세계개경 山鳴海嘯世界皆驚, 옥파시렬거국동경 屋破市裂擧國同驚 성자패시복종재래 成自敗始福從災來, 감이미사원축대흥 敢以微詞遠祝大興”
그런데 당시에 지진과 무관하게 유포된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의하여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6,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침략자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피해만 신경썼으며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들의 학살 문제에는 눈을 감고 말았으며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피해를 당하고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 살다보니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슬픈 백성들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큰 재난을 당한 일본이 크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위문서를 보낸 것 외에는 침묵하고 말았다.
제12회 장로회 총회 이후 김영훈 목사는 의주 서교회 목회와 양실학교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1923년 12월 4일에는 의주 서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예회를 인도하였다.
주일학교 교장 김영훈 목사 사회로 진행된 주일학교 제14회 학예회는 이삼천(二三千) 명에 달하는 회중이 참석하였으며 재미있고 의미 깊은 여러 순서가 진행되어 큰 감동과 결실 가운데 마치었다.
의주 서교회의 학예회는 의주 지역의 어린이 축제였으며 감동을 받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주일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의산노회 부회장이던 김영훈 목사는 1924년 2월 13일부터 의주 체마(替馬)교회 예배당에서 회원 70명이 회집하여 개최된 제11회 의산노회에서 노회장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의산노회 노회장으로 노회를 이끌었으며 제12회 의산노회 역시 그가 시무하는 서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제12회 의산노회는 1924년 8월 3일부터 3일간 노회장 김영훈 목사 사회로 회무를 처리하였으며 역시 서교회에서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의산노회 제직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의산노회 제직사경회에서는 선교사 1명, 목사 15명, 장로 74명, 조사 14명, 영수와 집사 180여 명, 기타 교우 140여 명 합하여 42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여섯 반(班)으로 나누어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일 오전 두 시간과 오후 8시에는 당대의 대부흥사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강사로 청하여 강연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4년 2월에 개최된 제11회 의산노회에서 노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장로회 총회에서도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제13회 장로회 총회는 1924년 9월 13일에 함흥읍 신창리 예배당에서 회집되었으며 의산노회 대표로는 노회장 김영훈 목사와 김석항(金碩伉), 안승원(安承源), 김취곤(金聚坤), 최성주(崔聖柱) 목사, 홍하순(洪河順), 김병률(金丙律), 조보근(趙普根), 리가은(李稼殷), 김시혁(金時爀) 장로, 남행리(南行理) 선교사가 참석하였다.
제13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리자익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영훈 목사는 양전백, 함태영 목사와 같이 총회 사기(史記) 검열위원에 선정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1928년에 발행되었으며 총회 사기(史記) 검열위원 김영훈 목사 가족의 입신 내용이 간단하게나마 잘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공천부 정기위원, 경북 노회록 검사위원, 신학교육부(3년조) 위원 외지(外地) 전도부(2년조)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