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23) 우남 이승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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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곤경은 ‘하나님의 기회’

감옥서 ‘깨달음’과 ‘감사’ 체험

이승만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등을 창간하여 언론매체를 통해 극렬한 반정부 데모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1899년 정부 전복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하지만 직접적 계기는 1898년 11월 19일 그가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된 다음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를 영입하여 새로운 혁신 내각을 조직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복역했다. 

한성감옥은 끔찍했다. 이승만을 면회하러 갔던 미국 선교사 에디(Eddy)의 기록에는 “그들의 감옥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자백을 받아 내거나 남을 연루시키기 위해 자주 고문을 가하고 죄수들을 축사(畜舍)에 가둔 소 떼처럼 이리저리 몰아붙인다. 죄수들은 위생 상태가 형편없고 해충이 우글거리는 흙바닥 위에서 숨막히게 답답한 분위기를 참아가며 잠시도 방을 비우지 못한 채 생활한다. 정치범들은 흉악범, 무뢰한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 답답한 감방 안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재빨리 칼을 쓰고 준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겹쳐 앉지 않는 한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간수들과 동료 잡범들에 의해 잔인하게 취급받았다. 구역질나고 때로는 부패한 급식이지만 약한 자의 몫을 강한 자가 빼앗아 먹는다. 정치범들이 겪는 고문은 죽음의 고통이다. 김모 씨는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한성감옥의 실태는 한 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의 목에는 무게 10킬로그램의 칼이 씌워졌다. 손에는 움직일 수 없도록 수갑이 채워졌다. 발에는 꼼짝 못하도록 족쇄가 물려졌다. 칼을 벗고 손발이 풀리는 시간은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단 5분뿐이었다. 

인간의 곤경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떨치며 일어나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달려갔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신을 찾는다. 형틀을 쓰고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중에 이승만은 성경을 찾았다. 어느 날 배재학당에서 들었던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설교가 떠올랐다. 순간 이승만은 목을 감싼 나무칼에 머리를 얹고 “오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해 주옵소서.” 이 짧은 기도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성경을 구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 방법을 통해 셔우드 에디 박사가 조그마한 <신약성경>을 보내왔다. 그것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에게 활력이 솟아났다. 그는 감옥에서 전도, 교육,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신약성경>으로 죄수들과 성경을 공부했다. 가끔 벙커(A. Bunker), 언더우드, 존스(George H. Jones) 등 선교사들이 성경공부를 도왔다. 이 성경연구를 통해 이승만은 감옥에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40여 명의 양반 출신 관료와 지식인들을 전도했다. 

이능화는 “선고부군이 원긍, (法部協辦), 李商在(議政府 參判), 유성준(內部協辦), 김정식(警務官), 이승인(夫餘 郡守, 李商在의 아들), 홍재기(開城郡守), 안국선(희경 郡守) 등을 포함한 양반들이 회개하므로 열매를 맺었다.” 이승만은 “옥중 경력의 두 가지 긴증한 것을 대략 말씀하고자 하오니, 첫째 깨달은 일이요, 둘째 감사할 일이라.” 그는 감옥에서 ‘깨달음’과 ‘감사’를 체험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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