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똑소리 나는 이어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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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가 지난 2월말에 사망했다. 문학 평론가요 저술가였고,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우리시대의 문화를 창조했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이런 이어령 선생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그는 서울문리대 3대 천재로 불리며 이미 한국문단에 작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20대의 젊은 나이로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국어선생으로 부임하여 수업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첫 시간에 백묵 한 개와 출석부만을 들고 들어와 칠판에 이어령(李御寧)이라고 한문으로 자신의 이름만 적어놓고 자기소개나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수업을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너무나 엉뚱한 그의 태도에 나는 몹시 얼떨떨한 심정이 되었고, 당연하게 무슨 내용의 수업을 하였는지도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했습니다”라고 수업을 마치는 순간에 수업을 마치는 벨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그는 “그럼 이상으로 수업 끝”하면서 교실을 나갔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않았든 정확하게 수업시간을 지키는 그런 자세에 경외감을 가졌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빠른 말로 강의를 하는 수업태도에 또 한 번 놀라움을 지녔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없어졌고, 언론을 통해 그가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가히 입을 다물 수 없는 놀라움을 지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은 있을 수 없었다. 

197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LA에서 생활하던 때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의사가 있었다. 마침 내 동생하고 친구인 이 의사는 평소에 나를 친형처럼 좋아했고, 나도 친동생처럼 여겼는데, 어느 날 SF에서 온 이종사촌 동생과의 저녁 식사모임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SF에 있는 헤이스팅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사람이었으며, 후에 검사를 거쳐 목사가 된 이민아 목사였다. 이때 그는 아직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화려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가정적으로도 불행했던 사람이었다. 이때 나는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편안하고 온화한 자세로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영특한 그가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전도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하나님을 영접했고, 드디어는 목사가 되었으며, 그전에 검사나 변호사의 위치에서 특히 마약과 범죄에 빠진 청소년을 선도하려고 노력했던 열정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일에 그의 일생을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항상 가슴속에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겨졌던, 그의 아버지인 이어령 선생을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구원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자신에 대해서 넘치는 자만심이 많았던 지성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딸이 병마에 시달려 실명의 위기에 있을 때에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간곡히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부녀는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았다는 ‘선한 흔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칭찬받을 그들의 행위가 너무나 부러워 우리의 귀감이 될 것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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