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1운동 좌절 후 등장한 김익두 부흥회
일제하 한국교회 역사에서 부흥회를 시기적으로 구별한다면, 대개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제1기, 김익두 목사를 중심으로 한 제2기,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한 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부흥사는 대개 10년의 간격으로 등장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길선주 목사는 한일합병 3년 전인 1907년 1월 평양을 강타했던 성령대강림 사건 이후에 등장, 활동한다. 김익두 목사는 3.1독립운동의 실패 뒤인 1919년 12월 경북 달성 현풍교회 사경회에서 박수진을 신유의 은사로 고치면서 본격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쳐갔다. 그리고 이용도는 일본의 15년 전쟁기가 시작될 무렵인 1930년을 전후하여 “고난받으시는 예수 신비주의”로 등장했다. 길선주 목사는 1935년에 서거했고, 김익두 목사는 1950년에 순교했고, 이용도 목사는 1933년에 서거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신유 은사의 이적이 특징이었다. 3.1독립운동의 실패로 좌절과 회의주의, 한탄과 낙심, 세속주의와 공산주의의 허망한 속임수가 세상을 어지럽히던 때였다. 기독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가 온 인류에게 신세계를 선물해줄 것이라는 헛된 환상이 한국 사회를 어지럽게 하고 한국교회에 현실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른바 과학을 내세우는 세속주의 공산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미신과 가진 자의 종교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 사설은 저 멀리 수평선상에 신시대, 신세계가 밝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 신시대, 신세계는 공산주의 세속주의 과학주의에 입각한 자력으로 펼칠 것이었다. “보이도다. 보라. 기천만의 남녀민중이 그를 향하여 노력함을”
2. 김익두의 ‘이적 명증회’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섬광처럼 폭발했다. 그의 부흥회에서 신유 은사의 이적이 계속되었다. 1919년 “아래턱이 떨어져 늘어진” 박수진을 고쳤고, 1920년 “경북 경산에서 풍증의 김손금 신유, 사월리 교회의 혈루증 박달옥의 신유, 고령의 반신불수 장의덕, 부산진 어린 앉은뱅이 김두수, 김해 진영의 혈루증 임수경 등에 대한 신유”가 그 일부분이었다.
“기미 이후에 만일 김익두가 아니더면!” 3.1독립운동에 식민지 한국과 한국교회에 몰아닥친 세속주의, 공산주의, 과학주의의 험악한 파고를 견디고 뛰어넘게 한 것이 바로 김익두의 부흥회였다. 선교사들도, 한국교회도 이를 환영했다. 특히 김익두의 신유 이적과 민중층에 파고든 복음의 메시지는 그토록 강력해서 하류층을 주요 침투 대상으로 여기던 공산주의자들의 극한 반감과 거센 반격과 공격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재령의 임택권 목사는 김익두의 ‘이적 명증회’를 발기하고 1919년부터 시작, 2년을 조사하여 1921년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을 발행했다. 그래서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는 장로회 헌법 조문의 수정을 건의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접수한 총회는 각 노회에 의견을 묻기까지 이르렀다.
류금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