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0년은 유대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 해 ‘아브’달(7~8월) 9일, 예루살렘의 성전이 불에 타 소실된 것이다. 로마 군대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전에 불을 질러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신앙을 지탱해주던 든든한 기둥이 송두리째 뽑혀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일찍이 바벨론 군대가 솔로몬 성전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의 꿈은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렇기에 고난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향했을 때, 그들은 성전 재건을 서둘렀고, 주전 515년에 두 번째 성전을 완성했다. 그 후 600년 동안 두 번째 성전은 나라 잃은 백성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굳건한 반석이었고,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한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인들을 더욱 절망시킨 것은 로마 제국의 통치 밑에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못했고, 성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이슬람교의 ‘황금 사원’이 차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성전이 잿더미로 변한 상황에서, 이제 유대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뿐이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이 의지하고 지키고 살아가야 할 ‘구원의 방주’였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 사회에는 희랍어로 기록된 엄청난 분량의 종교 서적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따라서 범람하는 많은 종교 문헌들 중에 옥석을 가려내어, 유대인 삶의 규범이 되고 신앙의 기준이 되는 책을 선별해야 하는 일이 시급하게 되었다. 많은 책들 중에는 이미 ‘성서’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책들이 있었다. 첫째는 ‘모세의 율법책,’ 즉 ‘모세 5경’이었다. ‘5경’은 이미 에스라 시대(주전 450년경)부터 ‘성서’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둘째는 ‘예언서’들이다. 주전 2백년대에 와서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 소선지자들은 다른 책들과는 구별된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문제는 나머지 책들이었다. 당시 넘쳐나는 수많은 종교 서적들 중에 어떤 책을 ‘성서’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결정은 서기 90년경 이스라엘 ‘야브네’(Yavneh, 희랍어로는 ‘얌니아’라고 부른다)에서 유대인 학자들의 모임에서 이루어졌다. 야브네에 모인 유대인 석학들은 많은 책들 중에서 ‘성서’를 선별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예언서 말라기 이전에 쓰여진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영감(prophetic inspiration)은 말라기 때로 끝이 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에 따라서 말라기서 이후, 즉 희랍 시대에 쓰여진 책들은 모두 제외되었다. 둘째는 언어의 기준이었다.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책이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희랍 시대 희랍어로 쓰여진 책들은 모두가 제외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의 책들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Holy Scripture)’로서 결정되었다. 이를 ‘팔레스타인 정경(Palestinian Canon)’이라고 부른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