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시부모(媤父母)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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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과거를 회상하면 좋았던 것보다는 안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존경스러운 어머님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생각이 난다. 22살에 결혼을 하고 장로님은 군에 입대하시고 혼자 낯선 시댁에서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꾸중도 들어가며 눈물도 흘리면서 시댁의 풍습과 살림을 배웠다.

처음으로 해보는 바느질, 다듬이질, 다리미질 등등 모두가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님께서 차근차근 잘 가르쳐 주셨다.

결혼식 끝나고 1개월 후에 교편생활을 시작했고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정성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따뜻한 점심을 일하는 아이편에 학교로 보내주셨고, 퇴근하면 책상 위에 간식이 담긴 꽃바구니가 항상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담임하고 있는 교실 환경정리도 어머님께서 오셔서 손수 해 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천식이 있으셔서 겨울이면 견디기 어려우심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 4남매를 해산관 하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편 장로님이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분가를 해서 서울에서 살게 되었는데 육군 중위 봉급으로는 아이 둘 데리고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았다. 몇 년을 지나면서 아이도 셋이 되고 생활비는 많이 들어가는데 부모님에게 항상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용기를 내서 아버님께 편지를 드렸다.

‘혹시라도 피아노를 살 수 있게 도움을 주신다면 제가 피아노 교습을 해서 살림에 보태고, 아범 대학원, 아이들 교육에 보탬이 되겠다…’는 내용으로 막내 시동생 편에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편지를 보시고 어머님과 의논을 하신 후에 노후를 위해 힘들게 저축하시던 적금을 해약하시고 70만 환이란 큰돈을 현금으로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오셨다.

저녁 식사 후에 나를 부르시더니 허리에서 전대를 풀어 내놓으시며 ‘이것이 나의 전 재산이다’ 하시는데 너무도 당황스러웠고 심장이 뛰어서 아버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도 몰라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받으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돈이 든 전대를 여러 번 확인도 해 보았다.

아버님께서 주무시는 방이 추우실 것 같아 밖으로 나가 아궁이에 불도 때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이도 어리고 피아노 전공도 하지 않은 며느리를 믿고 큰 돈을 내어주셨던 시부모님! 너무도 고마웠다. 감사의 표현도 잘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된다.

피아노 사기에는 20만 환이 부족해서 적금을 들고, 20만 환 융자를 받아 90만 환을 주고 호루겔 피아노를 샀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 회기동(경희대학 근처)에서 조그마한 집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 피아노가 배달이 되던 날! 꿈으로만 생각했던 나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그날 밤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후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힘들었어도 행복한 삶이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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