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울 수(羞) 자는 양 양(𦍌) 자와 삐침 별(丿) 그리고 소 축(丑) 자가 결합된 합성문자이다. 양과 소는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천제(天祭) 때 제물(祭物)로 올리던 가축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제물을 올려드려야 하는데 마음이 엇나간 앵돌아진 상태에서 양과 소를 제물로 올린 것을 깨닫고 귀밑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게 수치(羞恥)의 본래 뜻이다. 치(恥) 자는 ‘부끄러워하다’나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치(恥) 자는 귀 이(耳) 자와 마음 심(心)자가 결합한 합성문자이다. 부끄러움은 감정과 관련된 현상으로, 마음 심(心) 자의 쓰임은 알 수가 있는데 ‘귀’를 그린 귀 이(耳) 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부끄러울 치(恥) 자를 자전(字典)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얼굴이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게 되는 것을 착안해 만들어진 글자라고 적고 있다. 수치(羞恥)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이었다.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타인의 시선을 중요시 여기던 낯이 점점 두꺼워지더니 후안무치(厚顔無恥)가 다반사(茶飯事)가 되었다. 부끄러움이 마비되면 체면불구 하는 내로남불이 판을 친다. 패거리 끼리 당(黨)을 지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알기가 쉽지 않다. 믿음의 선진(先進)들은 자신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성찰(省察)이 있다. 나의 잘잘못을 스스로 양심에 따라 평가하는 행위이다. 두 번째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이 하는 평가(評價)이다. 세 번째는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이다. 하나님은 나의 잘잘못을 평가하여 심판(審判)을 하신다.
동양 문화는 타인의 시선을 중요시 여긴다. 그 중심에 수치심(羞恥心)이 있다. 서양 문화는 하나님 시선을 중요시 한다. 그 중심에 죄의식(罪意識)이 존재한다. 수치심은 집단주의적인 문화의 특징이고, 죄의식은 개인주의적인 문화의 특징이다. 분노, 좌절, 우월감, 공포, 비애, 기쁨 등 ‘본인 중심적 정서’와 동정심, 수치심 등 ‘타인 중심적 정서’ 중에서 개인주의 문화권은 본인 중심적 정서가, 집단주의 문화권은 타인 중심적 정서가 발달되었다. 수치심을 느끼고 안 느끼고는 나의 잘못을 남이 알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좌우된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면 사람은 대체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에 반해 죄의식은 비행(非行)을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양심의 잘못을 느끼는 내면적인 현상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야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부(恥部)를 가렸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은 아담과 이브를 찾아온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서 그들의 치부를 가리게 했다. 부끄러움은 가리개로 가려질 수 있지만. 죄는 가리개로 가릴 수가 없다. 회개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죄로 범해서 원죄(原罪)를 숨기게 된다. 죄(罪)로 죄(罪)를 숨기려는 거짓을 양산하기 때문에 돌아서지 않으면 파멸하고 만다. 이러한 죄의 속성(屬性)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기독교는 중요하게 여긴다. 믿음은 정직이다. 정직하지 못하면 믿음이 무너진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권에서는 일단 숨기면 수치심이 가려지기 때문에 쪽팔리지 않기 위해 거짓말과 위선이 기승을 부린다. 우리의 정치판에 드러나는 극심한 병폐이기도 하다.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아무쪼록 정직한 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새벽 두 손을 모아본다.
고영표 장로(의정부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