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8) 배위량 순례단의 역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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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55) 

청도에서는 청도 기독교총연합회 차원으로 배위량 순례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많은 인원이 순회전도여행길을 따라 걷고자 순례도 함께 했다. 대구에서는 대구제일교회 신자들이 순례에 참여하여 함께 순례했고, 대구에서의 <길 위의 학술대회>는 배위량이 자신의 자비로 구입하여 영남선교지부로 삼았던 옛날 대구제일교회 자리인 대구기독교역사관에서 시행되었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배위량 순례길을 함께 순례할 순례단을 조직하여 5박 6일의 도보 순례를 시행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어떤 길을 통해 걸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먼저 배위량의 2차 순회전도 여행의 노정을 알아야 하겠기에 배위량이 아들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책을 정독하여 읽었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길은 지금의 길이 아니라, 1893년도의 영남대로길이다. 영남대로는 과거의 길이지 현재의 길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성을 찾을 것인가, 현실성을 따를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가능한한 역사성을 추구하지만, 현실성을 따라야할 경우에는 그 현실성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길을 찾기로 결정했다. 아무도 아직 배위량 길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는 이가 순례에 함께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을 의논할 상대는 그 길을 찾아야 되겠기에 2016년 1월 4일(월)에 부산행 기차를 타고 내려가서 동래에서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을 위해 준비하였던 주막을 찾았지만, 그것을 현재 도저히 찾지 못하여 동래 읍성에서 부산대 정문을 거쳐 금정산 남문-동문-북문을 찾았다. 그날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을 거쳐 장군봉과 질레 쉼터 등을 통과하고 다방 섬거리까지 가고자 했다. 그런데, 고당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내려오는 등산객이 필자의 등반계획을 듣더니, 그 생각이 무모하다고 말렸다. “벌써 시간이 오후이고, 부산쪽의 산록은 산책길이지만, 양산쪽 산록은 험하고 더욱이 첫길이고 겨울철에는 해가 빨리 지므로 산 속에서 해가 떨어지면 금방 어둡기 때문에 큰일난다. 일단 내려갔다가 다음에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배위량의 제 2차 순회전도 여행 길에서 첫날 밤을 범어사 인근 주막에서 잠을 잤는데, 이참에 그 길을 걸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금정산 북문으로 내려가 범어사를 지나, 배위량이 험한 길이라고 표현한 범어사 산록길을 통해 걸어서 내려가 노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구로 와서 이튿날인 1월 5일(화)에는 새벽에 물금행 기차를 타고 가서 물금에서 삼랑진까지 순례를 했다. 물금에서 삼랑진까지 가는 길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막막했다. 옛날 조선 시대의 가장 큰 길이었던 영남대로는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고 처음 걷고자하는 순례자에게 누구하나 도움될 만한 안내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걸었던 첫 길이 물금에서 삼랑진까지 놓여진 낙동강 강변에 놓여진 자전거 도로였다. 필자가 배위량 길을 순례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길을 만들어 주신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 험한 낙동강 강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놓여져 많은 순례자가 이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길을 걷다보니, 그 강변 위태로운 절벽 위에 옛 길의 흔적이 보였다. 그 지역의 옛 영남대로의 대부분은 지금 철길로 편입되어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철길로 편입되지 않은 돌출부의 험한 작원잔도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멍하게 작원잔도를 보면서 그 옛날 배위량이 저 길을 걸어갔었구나 생각하니, 그날의 순례길이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힘듦이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책상 앞에서는 이론만 있었는데, 이렇게 길에 나와보니 실제의 길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에 삼랑진에서 대구로 오는 기차를 타고 왔다가 이튿날인 1월 6일(수)에 다시 어제처럼 새벽에 동대구역으로 가서 삼랑진에서 내린 후 그곳에서 밀양으로 갔다. 밀양에서 다시 상동까지 가서 상동에서 대구로 왔다가 수요일은 배위량의 일기를 다시 점검하고 공부하면서 길을 찾고 준비한 후 목요일인 1월 7일에 상동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청도역까지 홀로 도보로 순례를 했다. 그때 청도 첫 마을인 유천리에 있는 유천교회를 들러서 그곳에서 목회하는 최재성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배위량 순례단원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청도 구간의 순례책임자로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1월 12일(화)에는 지난번 순례에서 못했던 범어사에서 물금까지 순례를 하기 위하여 새벽일찍 부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노포동에서 내린 후 그곳에서 범어사를 거쳐 북문까지 걸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못했던 금정산성의 북문에서 고당봉으로 올라가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 시가지와 양산 시가지 동해와 남해를 바라보면서 힘든 금정산 산행길을 통하여 양산까지 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필자가 2015년 여름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처음 마주친 난관은 첫 날의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이었다. 40여 일간의 산티아고 도보 순례길은 첫 날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난코스이다. 순례자들은 그 산을 넘으면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하며 넘어가게 된다. 배위량 도보 순례길도 너무 평탄한 길만 있으면 의미가 줄어들 것 같아서 산악길이 한 곳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금정산 길이 있어 정말 의미있는 길이 될 것 같다. 1893년 4월 18일 배위량은 분명히 금정산을 넘는 노정의 길로 동래에서 양산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정산은 항구도시 부산이 가지고 있는 큰 자산이고 임진왜란과 무수한 전란에서 국가의 중요한 방어진지였다는 데서 역사적인 의미가 큰 산이고, 그것에 따른 역사적인 의미와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금정산은 크지 않는 산이면서도 갖출 것은 거의 다 갖춘 명산이고 이 길을 걸으면서 순례의 의미가 여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의 싸움이고 모험이고 험난한 인생살이에서의 견디고 이겨내는 훈련임을 깨닫게 한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여 필자는 첫 길을 주저하지 않고 금정산을 넘는 길로 선택했고 그 산을 넘으면서 동래에서 양산까지의 순례길의 이름을 “모험의 길”로 정했다. 

▲ 2016.1.5 작원잔도: 필자의 사진작품

▲ 2016.1.5 작원잔도 – 필자의 사진작품 –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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