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4일 조선 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10월 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11월 7일 인민공화국의 주석 취임을 거부했다. 이어 26일 임시정부를 우리 정부로 지지해 줄 것을 방송으로 요청했다. 이때 활발했던 조직은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 좌익들이었다. 이때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소 3국 외상회의가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합의했다. 이에 반대한 첫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전인 12월 17일 방송을 통해 소련이 한국을 노예로 만들고자 한다고 신탁통치를 비난했다. 그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둘로 쪼개져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반탁 시위를 함께 하던 좌익이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지령에 의해 찬탁하게 되자 혼란이 일어났고, 좌우익은 대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미국의 대외정책(U. S Foreign Policy. 1946)’에 이승만 제거계획으로 <Ever Ready Plan>을 작성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국 수립을 강력히 호소했으므로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6년 6월 공산주의에서 배제하기 위해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필요했다.
1945년 해방 직후, 문맹률이 70%를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이었다. 이승만은 문맹타파를 주장했다. 초등학교를 의무교육화했다. 1950년 6월 1일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됐으나 한 달 후 6.25가 터져서 1954년부터 계획을 세워 1959년까지 학령아동 96%의 취학을 목표로 의무교육을 추진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던 전시 연합대학의 경우나, 대학생은 전후 복구의 원동력이므로 재학 중엔 병역 면제 또는 유예조치까지 취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교육, 특히 대학에 쏟은 열정의 결과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교육기적’을 이뤘다. 이러한 기적은 그 후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다. 이승만은 기독교인이었지만 다른 종파 종교계 인사들과 대화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서 200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월 31일의 투표 결과 189대 8로, 이 나라 초대 국회는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배제하려고 했던 하지를 제일 먼저 소개했다. “누구보다 치하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하지 장군일 것입니다. 그가 이 축하의 자리에 동참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기 많은 미국 친구들을 모시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어려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간혹 오해를 하거나 부당하게 비난받은 적도 있지만 한 가지 위대한 사실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우리가 독립을 되찾는 것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와서 훌륭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을 설득했고 미국과 이승만은 한편이 되었다. 미국이 진주한 남한은 자유 민주국가가 되었고 소련이 점령한 북한은 공산국가가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