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1337~1453, The Hundred Year’s War)이 영국과 프랑스 간에 발생했다. 전쟁의 원인은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Charles IV)가 사망하자 그가 아들이 없던 차에 여성으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된 이사벨라(Isabella)는 그 대신 영국 왕으로 있던 자기 아들 에드와드(Edward)의 왕위계승을 주장하게 되어 프랑스 발루아(Valois) 家와 영국 플랜태저넷(Plantagenet)家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실제적인 내적 원인은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의 봉토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Jeanne d’Arc)는 1412년 프랑스 동부 동레미(Domremy)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13세 때 어느 여름 날, 은은하게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 속에 천사장 미가엘(Michael)의 모습이 나타나서 위기에 처한 오를레앙(Orleans)성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샤를(Charles) 왕자의 충실한 부하로 알려진 기사를 찾아가서 자신이 왕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한 끝에 마침내 승낙을 받았다. 그리하여 1429년 봄, 17세의 소녀 잔 다르크는 시농성(Chateau de Chinon)에 이르러 큰 궁전에 들어가 귀족들과 함께 있는 왕자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말했다. 샤를(Charles) 왕자는 그의 말을 존중하여 그가 내려준 말을 탄 후, 한 손에는 신의 가호를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 오를레앙성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아갔다. 영국군의 총공격은 이미 1428년부터 시작되어 그 주변의 성이 점령되고 오를레앙성은 영국군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잔 다르크가 시농성을 떠날 때 오를레앙성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아서 식량은 바닥이 나고 주민들은 하루에 빵 한 조각도 먹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때에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잔 다르크가 나타나자 오를레앙성을 지키고 있던 뒤노아 백작과 주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만큼 높아졌다. 이때부터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영국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끝에 영국군이 패하여 마침내 오를레앙성이 영국군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패하여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성에서 승리를 거둔 후 왕자가 기다리고 있는 시농성으로 돌아오자, 왕자는 성 밖까지 나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무렵 영국왕 헨리 6세(Henry VI)는 자기가 프랑스왕도 된다면서 프랑스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잔다르크는 샤를(Charles) 왕자에게 프랑스왕의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라고 권했다. 마침내 잔 다르크의 간곡한 권유에 왕자도 마음을 정하고 북프랑스에 있는 랭스(Reims)의 대성당으로 가서 대관식을 거쳐 샤를 7세(Chrles VII)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잔 다르크는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자를 랭스 대성당으로 가는데 호위해 주기도 했다. 그후 그는 달아나는 영국군을 추격해 가던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군과 내통하고 있는 부르고뉴군 속에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들의 공격을 받아 붙잡히고 말았다. 그후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마녀로서 “우상을 섬긴 이단자” 등의 죄를 씌워 루앙(Rouen)시의 광장에서 1431년 5월 30일 화형시켰다. 조국 프랑스를 구하고 불길 속에서 사라진 잔 다르크의 나이는 19세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후, 잔 다르크의 뼛가루는 센느(Seine)강에 뿌려지고, 뒷날에 다시 열린 종교재판에서는 그녀에게 마녀라는 누명이 벗겨지고 “거룩한 처녀”라는 이름이 붙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높이 받들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화형까지 당했지만, 그녀의 용기와 애국정신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승리의 큰 별이 되었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