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지난 20년 동안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면서 참 많은 손님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은 손님 한 분이 계십니다.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무렵에 40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 한 분이 가게로 들어섰고 아내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며 반갑게 그를 맞았습니다.
그 손님은 여성용 지갑이 진열된 곳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다행히도 손님이 원하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 있었던지 손님은 그것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다가왔습니다. 지갑의 대금을 치룬 다음, 손님은 만 원짜리를 몇 장인가 세더니, 방금 구입한 지갑 안에 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 아내가 손님에게 한 마디 건넸습니다. “지갑만 사드려도 좋아하실 텐데 돈까지 그렇게 넣어주시는군요. 오늘이 부인의 생일이신가 봐요”하면서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손님은 “아니에요. 집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리고 집에 와서 너무 우울해 하기에 위로해 주려구요. 잃어버린 것과 같은 지갑을 고르고 아내가 잃어버린 만큼의 돈을 넣었으니 지난일은 깨끗이 잊고 힘내라구요”하면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잠시 뒤, 손님은 곱게 포장된 지갑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가게 문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아내와 나는 넋을 잃고 그 손님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감동이 밀려와 나와 아내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나는 혼자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지갑을 사주기는커녕 “아니, 물건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핀잔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뜩이나 심란한 아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을 겁니다.
그 일이 있던 이후로 나는 내 가족이나 주변의 누가 실수라도 하면 ‘아내의 지갑을 샀던 그 손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나면 다음 순간, 실수한 상대를 탓하고 꾸중하려던 마음이 봄눈 녹듯 슬그머니 모두 사라집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손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묘약(妙藥)’을 내게 전해준 실로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 댁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인심’입니다. 정승이 죽으면 더 이상 도움을 받을 것이 없으니 문상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면 쉽게 손을 내밀고 풍성하게 베풀지만, 유익이 없는 이에게는 작은 배려도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작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후덕(厚德)한 마음의 배려일 것입니다. ‘배려’란 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극진한 배려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려’에는 온유와 인내와 겸손과 관용과 같은 성품이 포함됩니다. 죄로 무감각해지고 이기적이 된 세상에서 배려의 마음을 만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배려’하는 것이 어찌 보면 힘없는 자의 모습 같기도 하고 손해를 보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참 모습입니다. ‘배려’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을 대표하는 CEO (최고경영자)들 가운데 50명중 43명(86%)은 한 사람의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들이 “가족의 가치와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의 ‘FAMILY(가족)’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주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학설(?)이 있습니다. 즉 ‘FAMILY’를 풀어 말하면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여섯 개 단어의 이니셜(첫 글자)이라는 주장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40년간 영어를 가르쳐온 문 장로로서는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대하여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마는 그 아이디어 자체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다소 억지 주장이지만 그 착안(着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맞는 《가정의 달 5월》입니다. 하늘이 우리 가정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