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마천 고향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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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향은 있다. 내 고향인 지리산 정기가 흐르는 경남 함양 마천(馬川)은 신라 때부터 있던 고을로 지형이 말이 달리는 모습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 이름을 지어 주신 할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우리 가족은 1944년 여름 일본에서 마천 고향으로 나왔다. 산 높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고을이었다. 나는 도촌동네에서 땅벌(가흥) 면소재지에 있는 마천국민(현 초등)학교를 다녔다. 십리길 학교길엔 풀밭이 무성했다. 게바우소에 멱도 감고 가끔 만나는 뱀도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돌로 쳐 죽였다. 그 무렵 마천에 교회가 없어 나는 하나님을 모를 때였다. 그러나 아담 이브 부부를 유혹한 뱀이 원죄를 낳았기 때문에 교회없는 마천 어린이들이 하나님은 몰라도 우리의 원수 뱀을 산초나무로 초벌죽임을 이루어 놓고 돌로 쳐 죽여 죄값을 치르게 했다. 우리는 죽은 뱀을 여학생이 수줍게 책보 끼고 가는 신작로 풀밭길에 징그럽게 걸쳐 놓았다. 등하교 길에 느닷없이 죽은 뱀을 만난 여학생들은 기겁을 하며 어머나! 비명을 질렀다. 심술궂은 우리 남자 어린이들은 뱀에 놀라는 여자 어린이들 모습이 재미 있었다. 1, 2학년 일제시대 시절엔 학교 동쪽에 세워놓은 일본 귀신에 절하라 강요받았고, 우리 조선말을 쓰지 말고 일본말만 쓰라고 선생들이 강요했다. 1학년 겨울에 도촌을 떠나 땅벌까지 가는 날이 추워 동네 친구 병천이와 나는 본의 아닌 결석을 했다. 이튿날 담임선생 야나데이키 선생은 꾀 많은 친구가 다리에 붉은 물약을 바르고 붕대로 다릴 감고 절룩이며 선생 앞으로 나가 다리가 아파 결석했다는 사유를 말하니 그냥 속아 넘어갔다. 무섭게 구는 그 담임 선생 앞에 불려나간 나는 너무 순진해 아무 변명도 못하고 두렵게 서 있는 순간 곤나야로 하며 목조교실 바닥에 내 몸을 내동댕이쳤다. 크게 놀란 나는 담임 눈치를 보며 내 자리로 왔던 추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어린 나를 교실 바닥에 무작하게 내던진 그 야나데이키 선생은 아직도 밉게 생각된다.

1945년 8원 15일 광복의 감격을 나는 마천에서 맞았다. 면민들이 만세를 부른 학교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우리 태극기를 보았다. 가슴 뭉클하게 애국심이 솟았다. 마천지서 앞에 갔더니 일본인 지서주임 젊은 부인이 남편의 죄를 뒤집어쓰고 면민들의 오물 세례를 받고 풀어진 머리를 내려뜨린 채 오물로 강물이 된 방 가운데 처참하게 앉아 있었다. 포악했던 일본 통치 35년간의 죄값을 마천지서 주임의 공포에 떠는 부인 혼자서 다 짊어진 느낌을 받았다. 어린 나는 적개심을 떠나 인간적으로 참 불쌍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5학년 때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공비가 되어 마천초등학교에 공비토벌하기 위해 주둔해 있던 3연대 중대병력 국군을 기습하고 쫓겨가며 학교를 불질렀다. 갑자기 배움터를 잃은 우리 어린이들은 면사무소 공간, 임업시험장, 숯창고, 면장사택 등에 흩어져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했다. 그 때 5학년 교실은 면장 사택 아래채 집이었다. 그 때 한윤갑 담임 선생님은 풍금도 없이 육성으로 현제명 작곡의 <고향생각>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따라 부른 노래 가사 1절을 보면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내 동무 어디 두고 홀로 앉아서/이일저일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로 되어 있다. 공비 출몰지구 마천초등학교에서 배운 노래로 유일하게 한윤갑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고향생각>이 내 머리에 남아 있다. 여든 중반 고개를 넘으며 <고향생각>을 잊어본 일이 없다. 이원수 작 <고향의 봄> 노래가 연상되는 마천 내 고향에 날마다 주찬양 소리, 맑은 냇물 소리 함께 울려 퍼지길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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