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 노래인 이 유행가를 부르며 소박하게 살고 있던 함양중학 3학년인 내게 서울 막내 숙부의 상경 초청 연락이 왔다. 아우 오동해와 함께였다. 부산에서 밥상 행상하시는 아버지를 찾았다. 처음 보는 부산이 기차소리, 푸른 바다 모습이 부산해 보였다. 1953년 휴전협정 직후인 8월 13일 서울행 완행열차 기차표를 아버지가 사 주셨다. 석탄가루 날리는 완행열차 속은 아수라장으로 초만원이었다. 상이군인들이 쇠갈구리 손으로 물건을 팔며 비좁은 승객속을 누벼 다녔다.
처음 타보는 기차라서 신기한 마음으로 기차가 멈춰설 때 들리는 김천곶감,천안의 호두과자 소릴 들어가며 밤늦게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승객이 거의 다 내렸다. 한강 건너가는 도강증이 없기 때문이다. 연착된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영등포역 광장에 모두 앉아 날이 새길 기다렸다. 우리 형제도 좀 앉아 있다가 무료해 개찰구로 가 보았다. 아줌마 하나가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쏜살같이 기차에 오른다.
“동해야! 우리도 타 보자” 말한 나는 아우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타자마자 “누구얏” 벼락같은 헌병 소리가 들렸다. “학생입니다” 반사적으로 내가 크게 대답했다. “학생이면 다야” 또 큰소리가 들려 왔다. “모르겠습니다” 나도 큰 소리로 맞받으며 아우와 함께 텅빈 기차칸에 들어가 앉아버렸다. 그때 열차가 움직이고 기차는 어둔 한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곧 서울역에 도착하며 돈암동 숙부댁을 이 밤에 어떻게 찾아갈까 걱정하며 개찰구를 나오는데 어느 신사 한분이 “학생 어디까지 가나?”하는게 아닌가. 돈암동이라 말하니 자기는 혜화동까지 감으로 동행하자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서울 밤거리를 걸어오며 여기가 화신백화점, 창경원이라 신사가 말하는 사이 혜화동에 도착했다. 헤어지며 말하는 신사가 시킨대로 혜화동파출소를 찾아갔다. 친절한 순경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 파출소 건너편 36육군병원 ‘현 동성중고교’ 야전침대를 안내 받았다. 하룻밤 잘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육군 병장의 말대로 걸어서 삼선교에 이르렀다. 주소대로 쉽게 숙부댁을 찾았다. 숙부 숙모님은 아침에 데리러 영등포역에 간다고 약속했는데 도강증도 없이 한강을 건너 숙부댁을 찾아온 함양 산골 두 조카를 반가와하며 “촌놈들이 똑똑하구나”하시며 대견하게 생각하셨다. 나는 숙부의 택시를 타고 남대문 동대문 소릴 신기하게 들으며 바라본 서울 거리는 6.25 전쟁이 훑고간 자취가 황량해 보였다. 종로 을지로를 다니는 전차도 신기해 보였다. 한국은행 건물벽에 기관포 자국이 보이고 건너편 중앙우체국 건물은 허수아비처럼 뼈대만 서 있었다. 하나님 은혜로 막내 숙부를 통해 처음 본 서울이 신기하기만 했다. 청량리 철조망 근처 설렁탕집에서 숙부가 사준 설렁탕이 참으로 맛이 있었다. 이듬해 숙부 배려로 중고교 교육 때문에 서울에 올라 오게 된 우리 형제는 박재홍 노래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를 근 70년 “나는야, 서울이 좋아”로 바꿔 부르며 휴전 무렵 도강증도 없이 건너온 한강도 사랑하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